소크라테스는 죽으며 왜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했을까
▲ 40대에 ‘아테네 역병’ 겪으며 질병과 의술에 고민… 평소 훌륭한 의사라고 칭송했던 히포크라테스 대신 ‘의술의 신’ 언급은 자연스러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는데 잊지 말고 갚아 주게나.’ ‘내 그렇게 함세. 그밖에는?’ 크리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잠시 뒤 몸이 약간 뒤틀렸다. 사나이가 소크라테스의 얼굴을 가렸던 천을 벗기자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의 눈을 감겨주었다.”
플라톤(기원전 427~347년)이 저서 <파이돈>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의 최후이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에 대해 “삶을 일종의 질병이라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 삶이라는 질병이 치유되었다며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닭을 바쳐달라고 했다”는 둥 해석이 분분하다. 이 최후의 한 마디에 소크라테스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그만큼 아스클레피오스 신은 당시 아테네 사람들의 삶에 매우 친숙한 존재였다는 말이다.
나는 오히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와 <파이드로스>에 쓰여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의사라고 칭송했던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를 유언 격으로 언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스클레피오스의 대리석 상. 아테네의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원래 에피다우로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있던 것이다. | 민경화 사진작가 촬영
■ ‘아스클레피오스 지팡이’는 의사단체 상징
그럼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아스클레피오스가 히포크라테스의 17대 또는 18대 조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 신과 코로니스라는 인간 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스클레피오스는 태어나는 과정부터 고초를 겪는다. 즉 아폴론은 자신을 배신한 코로니스를 불더미 위에서 태워 죽이고는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를 코로니스의 뱃속에서 끄집어낸다. 정숙한 코로니스가 난산 끝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아스클레피오스는 제왕절개로 세상 빛을 보는 동시에 어머니 없는 아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 아폴론은 가여운 아들을 상체는 인간이고 하반신은 말(馬)인 키론에게 맡겼다. 키론은 아스클레피오스를 훌륭히 키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술도 정성껏 가르쳐 주었다. 이 과정에서 뱀 한 마리가 아스클레피오스의 귀를 깨끗이 핥고는 비법을 전수했다고도 한다. 그리스 전통에서 뱀은 구약성경과는 달리 지혜와 의술, 부활을 상징하는 영물이다. 오늘날 미국, 한국 등 많은 나라에서 뱀이 휘감고 있는 아스클레피오스(혹은 엉뚱하게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의사단체와 의술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장성함에 따라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 실력은 스승 키론과 아버지 아폴론을 능가하게 되었다. 끊어지기 직전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까지도 되살릴 정도였다. 이는 생과 사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으로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심사를 몹시 건드리는 일이었다.
때마침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다. 의붓아들 히폴리토스를 유혹하려다 거절당하고는 자기가 오히려 능욕당했다는 거짓 유서를 남기고 페드라가 자살했고, 이에 격분한 테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자기 아들을 죽여 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목숨을 잃은 히폴리토스를 아스클레피오스가 살려내자 드디어 제우스가 벼락으로 아스클레피오스를 쳐 죽였다. 아스클레피오스 때문에 죽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가 제우스에게 부탁해서 생긴 일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아스클레피오스는 할아버지인 제우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아들을 잃고 격노한 아폴론은 아버지에게 직접 대들지는 못하고 대신 제우스에게 벼락을 만들어준 퀴클롭스를 죽였다. 또 이에 대해 제우스는 아폴론을 1년 동안 밤하늘에 매달아 태양신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제우스는 아들과의 불화를 끝내려고 아스클레피오스를 신으로 부활시켰다.
■ 아버지·자녀 모두 의술의 신… 가업 계승
신화의 전개에 발맞추어 인간 세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섬기는 의술의 신이 교체된 것이다. 아버지 아폴론의 역할을 아들 아스클레피오스가 대신하게 되었으니, 교체이면서 가업의 계승이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버지 일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자녀들도 비슷한 일을 하도록 했다. 맏아들 마카온은 외과의 신, 작은 아들 포달리레이오스는 내과의 신이 되었다. 딸들도 모두 넓은 의미의 의업에 종사했다. 맏딸 히게이아(Hygieia, 영어 hygiene의 어원)는 위생의 여신, 이아소는 회복의 여신, 아케소는 치유의 여신, 아글라에아는 환희의 여신, 막내딸 파나케이아(Panakeia, 영어 panacea의 어원)는 만병통치약의 여신이 되었다. 마카온과 포달리레이오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의술은 뛰어나지만 전업 의사는 아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두 가지 점에서 아버지와 뚜렷이 달랐다. 아폴론은 병 주고 약 주는, 고마우면서도 무서운 신이었던 반면에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일 뿐 질병의 신은 아니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방자하게 자란 아폴론과 달리 여러 차례의 고난이 따뜻한 인간애를 갖게 한 것일까? 또 아폴론은 의술의 신이기에 앞서 태양신이었다. 의술은 부업인 셈이다. 반면에 아스클레피오스는 전업 의신(醫神)이었다. 인간 세상에 전업 의사가 나타난 것과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인간 사회의 변화와 소망이 신의 특성에도 반영된 것이다.
■ 그의 신전 건립시기, 전문의 탄생과 일치
아스클레피오스를 섬기는 신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6세기말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에 있는 도시국가 에피다우로스에 최초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세워졌다. 에피다우로스에는 선사시대부터 치유와 건강을 기원하는 성소가 있었으며, 기원전 800년 무렵에는 의술의 신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지는 등 유서가 매우 깊은 곳이다.
이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점차 늘어나 로마 제국 시절에는 300여개에 이르렀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각 시대마다 중요한 도시에는 대부분 세워졌다. 가장 유명했던 것은 에피다우로스와 코스, 페르가몬의 신전이다. 코스는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7년?)가 태어나서 교육받고 활동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페르가몬은 고대 서양의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갈레노스(서기 130~200년)의 고향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들은 대부분 서기 400년 무렵까지 잘 유지되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우상 금지 계명에 따라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도 문을 닫거나 교회로 쓰이든지, 아니면 파괴되었다.
아테네에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420년 전후로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에서 404년) 중 니키아스 조약이 맺어진 무렵이다. 10년에 걸친 전쟁이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때였다. 아테네는 이 전쟁 초기에 스파르타를 맹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보다 훨씬 무서운 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아테네 역병’ 또는 ‘투키디데스 역병’이라고 부르는 전염병이 창궐했던 것이다. 아직도 페스트, 두창, 발진티푸스, 맥각중독 등 정체에 대한 주장이 분분한 이 역병으로 최고 지도자 페리클레스(기원전 495년경~429년)를 비롯해서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사망했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5~400년경)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직접 목격한 장면일 것이다. “죽은 자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였고 반쯤 죽은 사람들은 거리 주변에서 비틀거리며, 물을 갈구하여 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신성한 장소들도 마찬가지로 시체들로 가득 찼다.” 아테네 사람들로는 처음 경험하는 참극이었다. 도대체 이 역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찾은 해답 가운데 한 가지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건립이었다. 신전을 세우기 전에 이미 역병은 지나갔지만 소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20년 동안 그만큼 끔찍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전쟁에 패배해서 그리스의 패권을 뺏기기는 했지만.
현대의학과 현대인들이 보기에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역병 퇴치는 관련이 없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여겼을까? 기원전 400년 무렵이면 이미 <신성병에 대하여>에서 볼 수 있는 합리적 의술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술이 역병에 대처할 힘을 갖추고 있었을까? 2000여년 뒤인 19세기말까지도 동서를 막론하고 두창(천연두) 말고는 대부분의 전염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방법을 가지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서에 나타나듯이 자신의 사고방식에 잘 부합하는 히포크라테스류의 합리적 의술에 경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40대 초반에 ‘아테네 역병’을 겪으면서는 질병과 의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소크라테스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를 언급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