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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는 현대의학의 모범인가

입력 2014.09.12 21:35

수정 2014.09.1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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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의학의 성인 히포크라테스도 의학의 황제 갈레노스도 역병 앞에선 속수무책

▲ 합리적 의학 세우는 데 기여했지만 실제 질병의 치료·예방은 당시 의학 능력 한참 벗어나… 역사적 진실 안에서 교훈·모범 찾아야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구약성경 <전도서> 1장 9~10절)

질병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여러 가지 병을 앓는다. 고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류 이전의 생물체에서도 다양한 질병이 발견된다. 예컨대 중생대에 살았던 공룡의 화석에서 양성인지 악성인지 확실치 않지만 종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라는 <전도서>의 언급처럼 질병은 태곳적부터 존재했다. 아마도 질병의 역사는 지구상에 생명체가 나타났을 즈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니, 인류는 질병을 품에 안고 태어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생명체는 환경에 반응하고 스스로 변화, 진화하므로 생명체에 서식한 질병도 끊임없이 변해왔다. 질병이라는 현상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질병의 구체적인 모습은 계속 변화해 온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 남쪽의 소도시 아나니에 있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프레스코 벽화(1237년 무렵). 고대 서양의학을 대표하는 갈레노스(왼쪽)와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에 대해 토론 중이다. 그 왼쪽에는 ‘원소설’을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이탈리아 로마 남쪽의 소도시 아나니에 있는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프레스코 벽화(1237년 무렵). 고대 서양의학을 대표하는 갈레노스(왼쪽)와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에 대해 토론 중이다. 그 왼쪽에는 ‘원소설’을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 히포크라테스 전집·황제내경 역사의 산물

‘의술’은 언제 이 세상에 나타났을까? 의술의 의미를 “질병이나 부상에 대한 대응”이라고 폭넓게 정의하면, 의술의 역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해(遺骸)와 유골 그리고 유적, 유물 등을 활용한 고고학적 연구와 현대판 원시인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로 선사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에 대해 적지 않은 사실이 알려졌다. 그들은 삼라만상을 귀신의 탓으로 돌렸듯이, 귀신이 저주하거나 몸속에 들어와 소동을 부려 병에 걸린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치료도 귀신에게 빌거나 귀신을 환자에게서 내쫓는 행위가 주를 이루었다. 머리뼈에 구멍을 뚫는 천두술(穿頭術)도 머릿속의 귀신을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한편 매우 더디지만 경험적인 지식도 쌓여갔다.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들판에서 풀을 뜯다 손등을 다쳤다. 평소처럼 다친 부위를 반대쪽 손으로 꾹 누르는데 방금 뜯은 풀이 쥐여 있었다. 그러자 피도 빨리 멎고 아픔도 덜했다. 현대인이라면 대번에 풀의 효과를 떠올릴 것이다. 원시인들은 쉽사리 알아채지는 못했더라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그 풀에 지혈, 진통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초)의 발견이고 합리주의적인 의술의 출발이다. 원시인들의 해석은 이랬을지 모른다. 풀 속의 착한 귀신이 나에게 해를 끼친 나쁜 귀신을 물리친 것이라고. 어쨌든 오랜 선사시대가 끝나고 고대 문명이 탄생할 무렵에는 몇백 가지의 약초를 알게 된다.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문자가 쓰이면서 발전의 속도는 빨라진다. 그리고 마침내 철학과 과학, 그리고 합리적 의학이 탄생한다.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던 변화가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황제내경>은 몇몇 천재의 머리에서 돌연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장구한 인류 역사의 산물이다.

■ 체액들 사이의 균형 유지가 건강 좌우

이 무렵 합리적인 질병관과 인체관이 자리를 잡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철학자이자 의사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0~430년 무렵)이다. 탈레스 이래 (자연)철학자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와 작동 원리를 설명했다. 탈레스는 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우주의 근원이라고 설파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흙, 공기 등 네 가지 원소가 기본 요소이고, 그것들 사이의 균형 여부에 따라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네 가지 원소에 상응하는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점액, 흑담즙, 황담즙이 인체를 이루는 요소이며 그것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 상태에 따라 건강함과 건강하지 않음이 정해진다고 했다. 균형이 잘 유지되면 건강하고 깨어지면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현대의학에서 강조하는 개개 질병은 별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체액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절제와 섭생이 강조되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는 경우는? 부족해진 체액은 보충하고 넘치는 체액은 덜어낸다. 예컨대 혈액이 부족하다고 여기면 혈액을 만들어내는 음식물을 섭취케 하거나, 빠른 효과를 위해 혈액을 잘 만드는 약(초)을 복용케 한다. 반대로 혈액이 많아지면 정맥을 절개하여 피를 뽑아낸다. 이러한 사혈(瀉血)은 19세기 초까지도 널리 쓰였다. 의학 유파들 사이에 구체적인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등 코스 학파는 약초 사용이나 사혈을 꺼리고 섭생을 강조한 반면 라이벌이라고 일컬어지는 크니도스 학파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방법을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학파 사이에 견해차가 없지는 않지만 핵심은 체액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예방이 중시되었다.

■ 고대 그리스 의학, 한의학과 상통

이렇듯 고대 그리스 의학은 현대(서양)의학보다 한의학과 상통하는 면이 훨씬 많다. 동과 서에서 합리적 의학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황제내경>의 탄생 시기와 배경이 비슷하거니와, 두 의학의 특성도 상당히 닮았다. 구성 요소와 원리가 각기 네 가지 체액과 음양오행으로 차이가 있지만, 인체 특정 부위에 자리 잡은 개개 질병의 치료보다 전체 인간(인체)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체계와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 갈레노스는 한때 ‘의학원흉’으로 매도

고대 서양의학을 집대성하고 체액설 등 의학원리를 체계화한 사람은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 페르가몬(지금은 터키 영토) 출신의 갈레노스(Claudius Galenos, 129~200년)이다. 히포크라테스를 부각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도 갈레노스이다. 갈레노스는 가히 암흑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세속문명과 의학이 쇠퇴했던 중세 초기를 제외하고 1700년대까지 ‘의학의 황제’로 군림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보다 더 방대한 갈레노스의 저작들은 1000년이 넘도록 누구의 도전도 허용하지 않는 ‘성서적’ 권위를 누렸다. 근대 서양의학의 역사는 갈레노스 의학이 허물어지고 그 위에 새로운 의학이 건설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체해부학에 기반을 둔 해부병리학이 확립되자 체액설을 핵심원리로 하는 고대 서양의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갈레노스는 의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원흉인 양 매도되기까지 했다. 갈레노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을 떠난 갈레노스가 이후 역사에 무슨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갈레노스에 맹종한 후대 의사들의 책임을 엉뚱하게 갈레노스에게 지웠던 셈이다.

현실적 의미를 상실한 것은 물론이고 존재조차 거의 잊힌 갈레노스에 대한 관심을 살려내려는 움직임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역시 이름은 기억되지만 역사적 의의는 망각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합리적 의학을 세우는 데 기여한 그들의 업적은 타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럼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 의학의 핵심이라고 할 체액설은 어떨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체액설은 해부병리학의 등장으로 폐기되었다. 역시 2000년 넘게 서양의 우주관과 물질관을 주도해온 ‘원소설’이 근대적 ‘원자론’에 밀려난 것과 마찬가지 신세였다. 체액설이 복권될 가능성은 원소설만큼이나 희박하다. 이들이 내세웠던 ‘자연치유력’은 어떠한가? 혹자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현대의학은 결코 인간의 자연치유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몇백년 동안 밝혀진 ‘자연법칙’을 활용한 새로운 치료법들로 그것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 최고 명의도 증상 완화시키는게 고작

‘최고의 명의’로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는 자신들 시대의 의학적 문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했을까? 갈레노스가 황제의 주치의로 활동하던 시절 대규모 역병이 로마 제국을 휩쓸었다. 두창일 가능성이 많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년, 재위 161~180년)가 통치하던 시기였으므로 흔히 ‘안토니우스 역병’이라고 부른다. 또한 갈레노스가 그것에 관한 기록을 남겨서 ‘갈레노스 역병’이라고도 한다. 갈레노스가 그 역병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치료나 예방은 당시 의학의 능력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시절의 ‘아테네 역병’과 14세기의 흑사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19세기 중반까지도 가장 큰 문제였던 전염병들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대유행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전염병도 마찬가지였다. 두창에 대해서만 ‘인두술’과 ‘우두술’로 예방을 하는 정도였다. 평균수명이 기껏 30~35세, 출생아의 절반이 열 살도 넘기지 못하던 시절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의사와 의학이 생명을 구하고, 중병을 치료하고 예방하여 사망률을 낮추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200년이 채 안 된다. 과거에 명의가 수많은 목숨을 건졌다는 얘기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표현일 따름이다.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에게서 교훈과 모범을 찾는 노력도 역사적 진실에 근거할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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