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약생활사…신동원 지음 | 들녘 | 951쪽 | 3만9000원
![[책과 삶]‘귀하신 몸’ 조선 명의… 이황의 청탁도 안먹혔다](https://img.khan.co.kr/news/2014/09/26/l_2014092701003490900293402.jpg)
사람이 어느 날 덜컥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명의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명의로 일컬어지는 의사들은 많지 않을뿐더러 대개 서울 대형 병원에 집중해 있다. 그들에게 한번 진료를 받으려면 길게는 두세 달씩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진료 예약자가 줄 서 있기 때문이다. 1분1초가 아까운 환자와 가족은 속만 타들어간다.
이런 광경은 16세기 조선에서도 목격된다. 퇴계 이황의 경우를 보자. 지방에 사는 이황의 인척이 중병에 걸려 이황에게 한양의 명의를 수소문해 처방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황이 아는 한 당시 명의는 안현, 손사균, 유지번 등 너댓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명의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황은 이들을 찾아갔지만 번번이 헛걸음이었다. 다른 고위직 양반의 청탁 등으로 왕진을 갔거나 돌보는 환자가 많아 집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황은 인척에게 보낸 편지에 “모두 대신들의 명령으로 해서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핑계대며 불러도 오지 않거니와, 친히 찾아가보아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적었다. 이황 같은 고위 관료조차 이 정도라면 벼슬이나 ‘빽’이 없는 평범한 양반들이 명의에게 진료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의료양극화도 심했다. 명의는 물론 제대로 교육받은 의원은 한양에 몰려 있었다. 지방 사람은 아플 때 전문적인 진료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명의부터 찾는 중병 환자의 심리는 물론 지역 간 의료불균형도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환자를 중심으로 본 의료 2000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선의약생활사>는 우리 선조들이 무슨 병을 앓았고 어떤 의학 지식을 활용했으며 어떤 약을 썼는지에 대해 기술한다. 의료제도와 질병의 사회학적 의미를 살피기도 하지만 책이 포커스를 맞춘 것은 ‘개인의 병앓이’다. 크고 작은 병앓이 모습을 통해 한 가족, 한 개인의 생활사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카이스트에서 한국과학사를 가르치는 저자 신동원 교수는 수업 중 학생으로부터 “노비들은 병났을 때 어떤 약을 썼나요”라는 질문을 간혹 듣는다고 한다. 책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다. 평민과 천민의 병앓이에 얽힌 내용이 풍부하다. 대중역사서의 성격이 도드라진 이 책은 낯선 질병 용어, 의약 용어가 수두룩하지만 전혀 딱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독자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학술을 표방한 저자의 의도가 살아 있다.

조선 시대 의원의 병자 진료 모습을 그린 감로탱(불교 탱화). | 들녘 제공
노비의 병앓이에 대한 기록으로 이문건의 <묵재일기>만큼 자세하고 가치 있는 사료는 없다. 16세기 인물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생이었던 탓에 스승이 몰락하자 자신도 유배생활을 하는 등 변변한 벼슬을 갖지 못한 사대부였다. 하지만 의학에 대한 조예가 남달라 각종 의약서를 익히고 직접 진맥하며 약을 조제하기도 했다. 그는 가족은 물론 노비들의 병앓이와 치료 내용을 매일 꼼꼼하게 기록했다.
가령 돌금이라는 여종을 보자. 돌금은 세 차례 학질을 앓았는데 그때마다 이문건은 복숭아씨를 복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복숭아씨는 효과가 없었다. 만수라는 남자 종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대소변이 나오지 않고 두통이 심한 증상이 오래가자 소주를 마셨더니 변이 나오는 듯했다고 떠벌렸다. 천민들 사이에 술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는데 만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문건은 음주치료법은 적절치 못한 방법이라고 만수를 나무랐다.
몹쓸 역병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이문건은 손자 한 명과 같은 또래 노비 2명이 나란히 역병인 두창(痘瘡)으로 앓아누웠다고 기록했다. 몸에 콩알 같은 붉은 멍울이 솟아나는 병증 탓에 두창이라 불리는 이 병은 이렇다 할 치료법이 없었다. 이런저런 약을 써보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하자 이문건은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거리를 하고 맹인 점쟁이(판수)를 불러 독경을 하게 했다. 무당과 판수는 조선시대 의료행위의 일익을 담당한 직업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 배후에 신의 힘이 있다고 믿어버린다. 두창의 경우가 그랬다. 조선시대 대중은 두창이 귀신들이 노해서 발병한다고 여겨 귀신을 달래줘야 낫는다고 믿었다. 이문건 같은 지식인도 그랬으니 일자무식 평민들이야 두말할 것 있겠는가. 이숙권의 <패관잡기>에는 두창신 숭배현상이 잘 묘사돼 있다. 두창이 발병한 집을 드나들 때 풍습으로 “관을 쓰고 허리띠를 매어 대면한 양 정중히 고하고, 두창이 끝난 지 1~2년 동안은 오히려 제사를 꺼린다”고 적혀 있다. 유학을 섬기는 사대부가 제사를 걸렀다니 공맹보다 두창신이 더 무서웠나보다. 몸이 아플 때 무당굿을 벌이는 광경은 21세기에 와서도 끊이지 않을 만큼 질병과 의학의 관계는 여전히 과학 영역만으로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생로병사라는 말처럼 병이란 곧 삶이기도 하다. 삶은 질병의 연속이라는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이문건처럼 조선 사대부는 의학을 익히고 베푸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했다. 치병이 곧 치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비가 진료를 하고 침을 놓으며 탕약을 끓이는 일이 조선시대에는 흔한 풍경이었다. 유의(儒醫)라는 명칭은 거기서 왔다.
다산 정약용도 <마과회통> 같은 의학서를 편찬할 정도로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심했고 40세 때 중풍을 앓는 등 병약한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자 의학이라는 자구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약절구는 자주 찧어 이끼 낄 새가 없지만 차 달이는 일은 드물어 화로에 먼지 앉았지.” 정약용이 49세 때 읊었다는 시 구절이다. 그는 병든 몸을 달래는 데 당시 유입되기 시작한 담배를 애용했다.
저자는 고려시대 이전 대중의 의약생활사를 엿볼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고려시대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정도만 이를 언급한다. 그럼에도 과거 우리 선조들의 의료문화가 한 손아귀에 잡힌다. 방대한 자료를 찾아 재구성하고 오늘날 다른 학자의 연구동향까지 꼼꼼히 정리한 <조선의약생활사>는 땀으로 쓴 대중역사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