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갤러리
조각가 정현(홍익대 교수)은 주목받지 못하는 재료들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내버려진 아스팔트 조각이나 철로의 침목, 석탄, 심지어 특별한 게 전혀 없는 잡석들로 인간 삶을 성찰하고 묘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의 이름을 딴 작품전 ‘정현’전(서울 삼청로 학고재 갤러리)은 그가 평소 공들여 작업하는 드로잉과 재료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입체 조각으로 구성됐다.
관람객의 눈길은 먼저 전시장 안팎에 놓인 거대한 무쇠 덩어리에 머물게 된다. 전시장 들머리에 잡석들과 함께 자리한 둥근 쇳덩어리는 묵직한 무게감과 더불어 표면에 긁히거나 팬 흔적 등 갖가지 형태의 상처들이 있다. 포스코에서 쇠 찌꺼기 등을 잘게 부술 때 사용된 파쇄공이다. 당초 16t의 무게이던 이 파쇄공은 10여년 사용되면서 8t으로 감소했다.
‘무제’라는 제목을 단 파쇄공 설치 모습.
크기와 무게가 줄어들면서 파쇄공에는 그동안 견뎌야 했던 상처들이 고스란히 새겨졌다. 숱한 시련과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파쇄공의 질감, 갖가지 흔적들은 사람이 짧은 시간 안에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힘든 것이다. 정 작가는 “파쇄공이 지닌 시련의 아름다움, 또는 일의 흔적에 주목했다”며 “나는 그저 그 파쇄공을 발견했고 그것을 전시장에 설치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재료가 가진 특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이를 미적으로 살려내는 작가의 철학이 파쇄공에 밴 셈이다.
이번 전시에는 철, 청동을 재료로 한 조각과 더불어 특히 드로잉이 많이 전시됐다. 그의 드로잉은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 생각을 오롯이 응축해낸 또 다른 작품이다.
“어느 때는 한 점의 드로잉을 하고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 하루 동안 작업을 아예 못한다”고 한다. 그의 드로잉은 종이 위에 연필 대신 콜타르나 오일바를 주로 사용한다. 특히 얇은 철판에 페인트를 칠한 뒤 몇 줄의 상처를 내 일부러 녹이 생기게 하고 이 녹물이 자연스레 흰 철판에 흘러내리게 한 ‘녹 드로잉’이 주목된다.
오랜 시간 비와 눈을 맞게 함으로써 녹이 잘 생기게 공을 들인 작품은 재료가 주는 분위기와 더불어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과 인간의 어우러짐까지 사유하게 한다. 11월9일까지. (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