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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품격

  • 최우규 논설위원

옛 부자들 가운데 여태 존경받고 기려지는 이들이 있다. 버는 방법이야 제각각이지만, 그들에겐 품격과 절제, 정의가 있었다.

[아침을 열며]부자의 품격

부자하면 경주 최 부잣집이 첫손에 꼽혔다.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했다. 최 부잣집은 기실 3000석 정도를 수확했단다.

1석은 성인이 1년 먹을 양식으로, 도정한 쌀로는 144㎏, 도정 안 한 벼는 200㎏이다. 도정한 백미는 농협수매가 기준으로 29만8800원이다. 3000석은 9억원 가까이 된다.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어마어마한 부자다.

최 부자 집안은 수확한 쌀 중 1000석은 집에서 쓰고, 나머지는 과객과 주변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썼단다.

최 부잣집에는 육훈(六訓)이 내려온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석 이상 재산을 모으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 땅을 늘리지 마라,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다.

그 집안 마지막 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은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어떤가. 물려받은 6000석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명예나 지위 욕심이 없어 어떤 단체에서도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1910년 경술국치에 우당의 6형제 가족 50여명은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로 망명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1932년 11월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만주 뤼순 감옥에서 숨졌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리는 ‘난잎으로 칼을 얻다-우당 이회영과 6형제’는 우당 일가를 돌아보는 전시다. 내년 3월1일까지 계속된다. 우당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난(蘭)을 쳐서 팔았다고 한다. 간난과 용맹 속에서도 아취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한창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부자들도 있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모 아파트 주민들이다. 1980~1990년대 고가 아파트의 대명사 같은 곳이었다. 지난 10월7일 이곳 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경비원 이모씨(53)가 분신했다.

그는 평소 70대 여성 입주민으로부터 인격 모독적 발언을 들어 힘들어했다고 한다. 동료들은 그 입주민이 “경비, 이거 받아 먹어”라며 5층에서 떡 같은 음식을 던지는 등 폭언과 비인격적 대우를 해왔다고 전했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이씨는 한달간 투병하다 숨졌다. 처음엔 사과를 거부하던 그 입주민은 숨진 경비원의 빈소를 찾아와 “아저씨, 미안해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통곡했단다. 이씨 부인은 그 입주민에게 “앞으로는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잘 좀 해주시라”고 당부했다. 이쯤에서 끝났으면 모파상이나 오 헨리의 단편소설 속 비극 같은 일로 그쳤을 것이다.

한데 더한 반전이 일어났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관리 용역업체 연장 계약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11월19, 20일 이틀간 그 업체 소속이던 경비원 등 노동자 106명 전원에게 해고통보가 갔다.

주민들은 “그간 수의계약을 해왔는데 이번부터 공개입찰로 방식을 바꿀 예정”이라며 “결정된 것은 없고 12월4일 입주자대표회의에서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용역업체가 입찰을 따내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경비원들의 불안은 당연지사다.

그 아파트 매매가는 13억6500만원에서 22억5000만원 정도다. 재산 가치로 치면 4500~7500석꾼인 셈이다. 경비원 월급은 120만원 안팎이다. 단순계산하면 한 푼도 안 쓰고 100년을 모아야 14억4000만원을 쥘 수 있다.

그곳 주민들에게 육훈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주민들 중에는 기부를 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품격과 절제를 갖춘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밖으로 비치는 상황만 보면 ‘없이 사는 사람들을 괄시하다가 쫓아내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 없게 됐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 가난과 천함이 부끄러운 것이며, 나라에 도가 무너져 있을 때에는 부유와 귀함이 부끄러운 것이다(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우리가 사는 나라는 어떠한가. 하긴, 2000년 전 중국 후한을 농단했다던 환관들 ‘십상시(十常侍)’가 다시 운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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