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는 어떻게 속이는가…피터 스와이저 지음·이숙현 옮김 | 글항아리 | 283쪽 | 1만5000원
![[책과 삶]정치인들은 어떻게 기업을 갈취해 자기 주머니를 채울까](https://img.khan.co.kr/news/2015/04/24/l_2015042501003868200326321.jpg)
폭력이 동반되지 않는 범죄에서 뇌물과 갈취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겠지만 돈 거래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당사자가 어느 쪽인가로 구분할 수도 있다. 뇌물은 주는 쪽이 거래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반면, 갈취는 받는 쪽에 주도권이 있다. 그렇다면 기업인과 정치인 사이에 벌어지는 돈 거래는 어떤 경우일까. 우리는 통상 뇌물이라고 답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갈취에 해당한다. 당하는 쪽은 뇌물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갈취’가 원제인 이 책은 미국 정치인들이 기업과 같은 이익집단을 상대로 어떻게 돈을 뜯어내는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가장 전형적인 갈취는 ‘보호금’ 형태다. ‘돈을 내면 당신은 안전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들 거야’라는 압박 수법이다. 조폭이 자릿세를 거둬가는 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저자는 미국 워싱턴 정치인들이 받는 기부금이 보호금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법과 규제의 생살여탈권을 쥔 채 이익집단에 모금 행사 초대장을 보낸다. 초대장은 보호금을 내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이를 거부하기란 어렵다. 해서 법안이 하원 표결을 앞둔 시점에 보호금 거두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의원들이 주관하는 모금 행사가 이즈음 가장 많다고 한다.
갈취는 공화당, 민주당 가릴 것 없이 만연해 있으며, 그 대상도 무차별적이다. 2011년 반해적법안을 둘러싼 민주당의 모금 활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영화 등을 다운로드받는 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 반해적법안의 골자다.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은 반해적법안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할리우드 영화업계를 상대로 상당한 기부금을 거둬들였다.
반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인터넷 기업에 반해적법안은 막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들은 전전반측했다. 오바마는 인터넷 업체 경영진과 회동하기 시작했고, 민주당 의원들이 이들을 모금 행사에 초대하는 일이 잦았다. 기부에 인색했던 인터넷 업체들의 지갑이 서서히 열렸다. 반해적법안을 둘러싼 혼돈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는 경쟁적으로 기부금을 냈다.
규제를 외치던 오바마는 갑자기 표현의 자유를 역설하기 시작했다. 입장을 바꾼 것이다. 결국 반해적법안은 붕 떠버렸다.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는 모두 패자가 됐고, 승자는 오바마였다. 오바마는 대선을 목전에 두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후원금을 긁어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법안을 빌미로 이뤄지는 갈취는 미국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를 위해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는 법안이 허다하다. 대개 이런 법안은 처음엔 요란하다가 나중엔 길을 잃고 표류한다. 이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자는 입법자, 즉 의원들이다. 저자는 이런 법안을 ‘쥐어짜기 법안’이라 부른다. 이익집단으로부터 돈을 쥐어짜낸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게 조세감면 연장안이다. 미 의원들은 조세감면 연장안을 입법화하지 않고 해다마 갱신만 거듭했다. 2011년 조세감면 연장안은 154개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 이 법안의 갱신 과정은 갈취의 훌륭한 타이밍이었다.
정치인의 모금이 갈취라는 증거는 또 있다. 로비스트나 선거운동원에 가족, 친지를 고용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의원들이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아들, 딸에게 급료로 수천만원씩 지급하는 일이 미국에선 낯선 일이 아니다. 2008년과 2010년 선거에서 선거위원회 급여 명단에 가족 이름을 올린 의원은 82명에 이른다.
저자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을 갈취의 귀재로 손꼽는다. 하원의장은 상임위원회 통과 법안의 표결 일정을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다. 표결에 부치지 않을 권한도 있다. 베이너는 이런 권한을 잘 활용해 막대한 기부금을 거둬들이고 있다. 그가 정례적으로 벌이는 모금을 위한 해변 파티는 워싱턴에서 악명 높다고 한다.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 두목 돈 콜리오네에게 어느 날 가수인 양아들이 찾아온다. 양아들은 할리우드 제작자로부터 영화 출연을 거절당했다며 콜리오네에게 도움을 청한다. 콜리오네는 “제작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라며 양아들을 안심시킨 후 돌려보낸다. 얼마 후 아침에 깬 제작자는 침대 위에서 절단된 말 머리를 발견하고 기겁한다. 그 뒤 양아들은 영화에서 배역을 맡는다.
저자는 워싱턴에서 정치인과 이익집단의 관계가 콜리오네와 할리우드 제작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마피아 세계처럼 기부금의 이면에도 ‘공포의 조장과 불가항력’이라는 메커니즘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정치인에 대한 기부 행위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책은 판례가 미사여구에 불과함을 증명한다. 저자는 나쁜 정치인만 제거하면 정치판이 깨끗해질 것이란 믿음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합법의 가면을 쓴 부패의 뿌리는 깊고 일상적이다. 냉소적이지만 설득력 있다. ‘성완종 리스트’로 들춰진 부패상이 우리 정치의 맨얼굴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