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구인회 지음 | 한길사 | 321쪽 | 1만8000원
![[책과 삶]종말, 이주, 영혼의 무덤, 친구, 잠, 암흑… 죽음이란 무엇인가?](https://img.khan.co.kr/news/2015/05/08/l_2015050901001009000097571.jpg)
죽음을 둘러싼 사유에 관한 한 몽테뉴만큼 많이 언급되는 철학자는 드물다. 젊은 시절 몽테뉴는 유달리 죽음에 대한 사유에 집착했다. 집착이 너무 지나쳐 불안으로 이어졌다. 죽음은 두렵고 나쁜 일로 인식됐다. 그러던 중 그는 낙마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깨어난다. 낙마 사고는 죽음에 대한 몽테뉴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일찍이 플라톤도 몽테뉴와 비슷한 사생관을 피력했다. 그는 죽음을 종결·상실로 파악하지 않고, 삶이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이주로 여겼다. 그는 죽음에서 희망적인 가치를 발견하려 했다. 플라톤 사상을 마중물로 하는 철학자들은 죽음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 나섰다.
“철학자들의 전 생애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점철된다.” 로마 시대 키케로의 언급이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죽음은 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테마였다.
삶이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파고들자면 죽음이라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죽음을 삶과 분리해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유들을 다룬다. 저자 구인회 교수는 생명윤리학에 두각을 보이는 철학자이다.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 사고하는 철학자들은 몽테뉴, 플라톤과 다른 입장에 서있다. 피타고라스는 육체를 영혼의 무덤이라고 일갈했는데 이원론의 시조쯤 된다. 데카르트는 육체를 태엽 감는 시계에 비유했다. 이 때문에 죽음은 한 기계의 종말을 의미할 뿐이다. 기계의 종말은 영혼과는 무관한 사건이다. 유의미한 것은 영혼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혼을 다르게 부르자면 정신, 이성인데, 이런 것들은 죽음과 달리 불멸성을 지닌다고 봤다. 칸트, 헤겔 같은 이성주의 철학은 불멸성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스피노자와 쇼펜하우어는 죽음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이라서 보편적인 것을 논할 여지가 없다고 봤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문화적인 것이기도 하다. 시대 분위기 따라 죽음에 대한 태도도 상이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죽음은 적이자 친구였다. 달콤한 잠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암흑의 지하세계로 묘사되기도 했다. 죽음은 모순덩어리로 이해됐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사람들은 죽음 문제를 애써 회피했다. 저자는 이를 ‘죽음의 망각 시기’로 분류한다.
오늘날은 어떨까. 한 시대가 어떤 시선으로 죽음을 바라보는가는 삶을 어떻게 성찰하는가와 직결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의미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