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통합과 봉합

김광호 정치부장
[아침을 열며]통합과 봉합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죽어서 얻는 게 있다’고 했더니 ‘이 사람아 죽으면 끝이지, 뭐가 더 있나’라고 하더라. 지난번 대선 때도 문재인 후보에게 이야기했다. ‘(특전사 시절) 낙하산 지고 뛸 때 펴진다는 보장이 있었느냐. 뭐가 겁나느냐’고 말이다. 난국의 지도자는 지략도 있고 배짱도 있어야 한다.”

최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전해준 이야기다. 여야를 넘나든 당대의 책사가 정치권, 특히 야당을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전한 충고다. ‘대선’이란 역사의 게임 앞에 선 장수들은 ‘뜻밖’에 유약했던 셈이다.

4·29 재·보궐선거의 파문이 깊게 야당을 흔들고 있다. 여권에 국정난맥의 ‘정치적 책임’을 묻지 못한 새정치민주연합은 지금 거꾸로 그 실패에 대한 ‘정치적 책임’의 세찬 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다. 당이 쪼개질 듯 위태한 내홍이 이어지고, 지도부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다가올 새벽을 향한 진통이 아닌 깊은 어둠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혼돈이다.

재·보선 나흘 뒤 광주를 찾은 문재인 대표의 반성의 염(念)은 “회초리를 겸허히 받아들여 더 크게 통합하겠다”였다. 2월 전당대회에서, 이후 ‘문재인식 탕평’의 이름으로 몇번이고 강조한 통합을 다시 되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내에서도 “이런 때일수록 통합으로 가는 길 맨 앞에 문 대표가 나서야 한다”(김한길 전 공동대표)고 요구한다.

‘통합’의 유행가는 임계점도 넘어버린 제1야당의 계파 불신과 갈등의 역설적 상징과도 같다. ‘통합’ 진단은 정치인이 아니어도 증오만 가득 찬 새정치연합 민낯을 지겹도록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일 게다.

문제는 통합의 내용이다. 과연 지금 변죽만 울리듯 흘러나오는 통합이 진짜배기 통합인가 하는 것이다. ‘세 번의 죽을 고비’를 거론했던 문 대표의 그간 계파 안배식 통합은 재·보선을 통해 실패로 판명났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계파의 본능 앞에 통합의 이성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자리만 나누는 식 탕평은 ‘지금 이대로’를 이어가려는 ‘봉합’의 정치적 화장일 뿐이다.

안철수 전 공동대표 측근이던 금태섭 변호사는 20일 페이스북에 ‘진단부터 틀렸다’는 글을 올렸다. 주목할 부분은 이 대목이다.

“ ‘제 살 깎기’를 해야 한다. 안철수 전 대표가 친노의 살을 깎자고 나서면 과연 가능할까. 문재인 대표가 비노나 호남 정치인들에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라 호통치면 그게 먹힐까. 오직 ‘자기 편’만이 ‘자기 편’에게 양보를 강권할 수 있다. 그 일을 먼저 해내는 계파는 권위와 진정성을 가지고 다른 계파에게도 혁신을 요구할 수 있다.”

그보다 이틀 전 조국 서울대 교수는 트위터에 “문재인, ‘육참골단(肉斬骨斷)’해야 한다. 친노건 호남이건 모든 기득권을 잘라야 한다”고 남겼다.

살벌하다. 그만큼 비상한 상황이란 진단이다. 공통적으로 문 대표에게 수족을 모두 잘라내는 비상한 결단으로, 계파 갈등의 ‘심장’들을 모조리 도려내라는 명령이다. 그렇지 못하면 ‘친노 패권’ 논란도, ‘친노 패권’을 방패 삼아 역공생하는 계파의 영악함도 절대 제거할 수 없다는 예언이기도 하다.

봉합은 손잡고 다 살아보자는 ‘유혹’이고, 통합은 역설적으로 다 죽자는 ‘결기’가 돼야 한다. ‘사즉생생즉사(死卽生生卽死)’다. 지금 야당 현실이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변화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인가.

한 가지 결정적인 것이 더 있다. 진정 ‘다 죽기’를 각오하는 사즉생의 혁신으로 나아가려면 문 대표부터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문 대표만이 아니라, 새정치연합 지도부·잠룡 모두가 그런 공포 속에서 절박하게 하루하루를 헤쳐가야 한다. 모진 바람이 몰아치는 황무지로 스스로를 내몰아야 한다.

문 대표부터 내년 총선에서 ‘죽을 수 있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편안하게 대권의 길을 닦겠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 생과 사는 하늘(민심)에 맡긴 채 다시 ‘부산 바닥’을 한번 뒤집어 보겠다는 투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산 바닥이 디비지는’ 충격을 만들어 낸다면 지금 제1야당이 겪는 내홍과 좌절의 어둠은 임박한 새벽의 기대 앞에서 안개처럼 흩어질 것이다. 또 다른 부산 출신인 안 전 대표와 나란히 손잡고 간다면 그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이 대권까지 가는 길고 긴 ‘문·안 경쟁’의 서막이어도 좋다.

권력의지와 권력욕은 여기에서 나뉜다.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절박함에서 싹 터 치열함으로 분출된다. 절박함과 치열함이 없는 권력 추구는 ‘권력 욕망’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에 안주하는 정치야말로 권력욕의 전형이다. 지금 문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을 빌린 봉합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버려 전투에 나서는 장수의 결기와 현명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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