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파우스트·오셀로, 테러리스트와 대테러작전… 악은 그냥 악… 이유를 묻지 마라

서영찬 기자

▲ 악…테리 이글턴 지음·오수원 옮김 | 이매진 | 222쪽 | 1만2000원

[책과 삶]파우스트·오셀로, 테러리스트와 대테러작전… 악은 그냥 악… 이유를 묻지 마라

영화 <엑소시스트>에는 악령에 홀린 소녀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녀 속의 악마는 소녀 존재의 본질일까, 아니면 낯선 침입자일까. 달리 말해, 악마적 힘은 소녀의 정체성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소녀는 악마적 힘에 굴복한 꼭두각시일 뿐인가. 악의 본성 탐구에 들어가며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이다.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 소녀에게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대입할 수도 있고, 홀로코스트를 지휘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대입해 볼 수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악의 개념을 허물어뜨린다. 악은 선 혹은 윤리의 대립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악은 본질적으로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합리성 따위는 없다. 이성이라는 잣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자유주의·계몽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은 악에서 원인을 읽어내려 하거나 악을 종양처럼 제거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부질없는 짓이다.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없다. 악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전제로 할 때 성립한다. 그래서 악은 원죄와 닮았다. 그런데 악은 신이 부여한 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복을 꾀한다. 그 행위가 바로 파괴 행동이다. 문학비평가답게 저자는 이 같은 악의 본성을 여러 소설을 통해 파헤친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윌리엄 골딩의 <핀처 마틴>의 주인공과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속 이아고는 자기 파괴적인 인물이다. 악의 전형이라 부를 만한 이들의 악행에는 ‘왜’가 없다. 따라서 악은 존재 그 자체, 즉 정체성에 가깝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악이라 지칭하면서 ‘왜’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유를 설명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태도인데, 그래야만 악에 대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합리성을 신봉하는 계몽주의자의 속성이 그렇다. 9·11 테러를 악의 전형, 이란과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 정치인의 시각은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9·11 테러 희생자 숫자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미국의 대테러 작전으로 죽었다. 악에 합리성이 없으니 악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저자가 볼 때 악은 불가피한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잠 못 이루고 애태워 걱정해야 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대다수 진보주의자, 사회진화론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악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고 꼬집는다. 리처드 도킨스류의 진보에 대한 선량한 믿음도 반대한다. 진보 신화에 사로잡힌 자들은 마취제 없이 이빨을 뽑으려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마취제란 불가피한 악과 같다.

책은 악의 철학이라 해도 될 만큼 악을 깊고 넓게 성찰한다. 고희를 넘긴 이 석학은 문학은 물론 신학과 역사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단문의 사색적인 글들이 반도체 회로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때로는 저자 특유의 압축적 비유를 따라잡기가 만만치 않은데, 이것은 우리가 합리주의, 계몽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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