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판이 열렸다. 이 바닥에서 거래규칙이 하나 있다. 모두 같은 ‘칩’을 사용한다는 것. 잘 알려진 플레이어는 ‘독불장군’ ‘프로듀사’ ‘영아니네’ 3인방이다. 독불장군이 ‘하우스’ 개장을 주도했고, 한때 칩을 좌지우지했던 영아니네는 빠졌다. 독불장군은 판을 크게 벌여야 더 먹을 것이 있다며 참가자를 끌어들였다. 그중에 하나가 ‘그로기’였다. 그로기는 도박판에 낄 실력도, 돈도 부족했다. 독불장군은 그로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몇몇을 끌어들였다. 가지고 있는 돈을 높은 가격으로 산정해 칩으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로기는 갑자기 부자가 됐다는 착각에 빠져 칩을 뿌렸다. 그러나 실력이 달리는 그로기는 독불장군과 같은 노련한 상대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독불장군의 테이블에 칩이 쌓여갈수록 그로기의 주머니에서는 칩이 빠져나갔다. 칩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는 그로기에게 독불장군은 몇 차례 빌려주면서 아껴 쓰고 빌려준 돈도 갚으라고 했다. 칩을 또 빌리러 오자 독불장군은 “그로기가 게을러 본때를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그로기의 생각은 달랐다. “쥐어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칩도 추가로 빌려주고 빚도 일부 탕감해줘야 자신도 살고 빚도 갚아나갈 수 있다”고 했다. 자꾸 가혹한 요구를 강요하면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며 벼랑에 한 발을 내려놓았다. 칩을 사용하기로 하면서 그로기의 생활은 엉망진창이 됐다. 유럽통화동맹에 가입한 그리스 얘기다.
그리스는 빚을 갚지 못하고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다.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다. 채권국이 제시한 요구조건을 받아들일지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국민들은 반대(oxi)를 외쳤다. 유럽의 통합과 번영을 주창했던 유로화동맹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통화동맹은 기원전 2세기 소아시아 도시국가 간 유통된 시스토포리 협약은화(協約銀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시대 뤼베크와 함부르크의 통화동맹(1225년), 독일지역 보덴호 연안 도시 간의 통화동맹(1240년)도 동일한 화폐를 사용하는 협약들이다.
통화동맹에 나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화폐교환에 따른 거래비용이 줄어든다. 공동의 화폐를 쓰면 이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무역거래도 더욱 활발해진다. 이와 함께 환율의 안정을 가져오고 국제통화로 자리매김하면 정치·경제적 영향력도 강화할 수 있다.
통화동맹의 가장 성공적인 예는 미국이다. 개척시대 미국에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국가의 화폐와 각 주들이 발행한 주화가 혼용됐다. 그런데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각 주들은 심각한 부채문제에 봉착했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연방정부가 등장하며 통화동맹으로의 이행을 시작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정치적 결속력이 통화동맹의 핵심요인이었고 지금 달러화는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다. 독일의 경우도 39개의 군소도시 관세동맹 합의로 경제통합 기반이 만들어져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라틴통화동맹(1865년)과 스칸디나비아 통화동맹(1873년) 및 동아프리카3국의 관세동맹(1919년)은 실패로 끝났다. 강력한 정치적 통합의지가 바탕이 되지 않는 한 통화동맹은 사상누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통화동맹은 대공황 이후 통화안정책을 찾으면서 시작됐다. 이런 노력은 유럽 정상들의 단일통화체제 도입주창(1978년), 유럽통화동맹 가입(1979년), 프랑스 자크 들로르 재무장관의 단계적 통화동맹추진(1988년) 등을 거쳐 유로화의 출범을 알리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1992년 성사됐다.
하지만 유로화는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회원국 간 경제적 격차가 심한 상태에서 재정통합 없이 단일통화가 도입됐다는 점이다. 정치통합도 없다. 그리고 각 회원국들이 독자적인 환율정책을 쓸 수 없는 것도 치명적이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화가 평가절하되면서 수출이 늘어나 이를 통해 빚을 갚고 경제체력도 보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팔을 묶고 다리로만 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체제의 약점은 위기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유럽통화동맹도 마찬가지다. 유로화는 달러를 뛰어넘는 기축통화의 꿈까지 꾸었으나 현실과 달랐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유럽통화동맹의 주변국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은 큰 타격을 입은 반면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져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스 사태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형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렉시트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의 요구를 유럽통화동맹의 유지를 위한 ‘관리 비용’으로 볼지, 인내의 한계를 넘는 ‘고통’으로 여길지에 그리스와 유럽통화동맹의 미래는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