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재일조선인 청년의 꽉 막힌 삶을 열어 준 시와 시인들

서영찬 기자

▲ 시의 힘…서경식 지음·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96쪽 | 1만4000원

[책과 삶]재일조선인 청년의 꽉 막힌 삶을 열어 준 시와 시인들

재일조선인 서경식은 소년기와 청년기 자신의 삶을 ‘폐색’이라고 규정한다. 폐색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닫혀서 막힌 상태’라는 뜻과 함께 ‘겨울에 천지가 얼어붙어 생기가 막힘’이라는 의미도 나온다. 3등 시민으로, 경계인으로 살아야만 했고, 두 형은 한국 유학 중 간첩으로 몰려 1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으니 저자의 삶은 절망 투성이였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준 것이 바로 시다.

그는 어릴적부터 이상화, 윤동주, 한용운을 알게 되고 김지하, 김수영, 정희성, 양성우, 박노해 등과 만났다. 이들의 시에서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려는 의지를 읽으며 힘을 얻었다. 폐색 짙은 삶에 작지만 강렬한 햇살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교생 때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 시를 쓰고 스스로 시집을 엮었다. 책에는 이 시들이 처음 소개돼 있다. 서경식의 첫 문학 산문집인 이 책에서는 한국 시인을 비롯, 그에게 영향을 끼친 중국과 일본 작가들이 다수 언급된다. 이 가운데 그가 가장 감응한 작가는 루쉰이 아닐까 싶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중학생 때 교과서에 실린 루쉰의 ‘고향’ 속 이 구절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희망이 안 보이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바로 시의 힘이었다. 저자는 승산과 효과가 없더라도 부딪치는 게 시의 본령이라고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시인 김지하, 박노해, 정희성의 ‘변화’가 씁쓸하다. 저자는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에는 서경식의 언어관도 잘 드러나 있다. 언어는 곧 정체성과 직결되는데, 그는 어릴적부터 정체성 문제와 마주했다. 소학교 시절 수업 중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어야 할 때도 그랬다.

‘우리나라의 4대 공업지구’ 같은 문구와 마주치면 그는 ‘일본의’라고 바꿔 읽었다고 한다. 때때로 말끝을 흐리게 발음했는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고 한다. 그 까닭에 그는 자연스럽게 언어교육과 언어생활에 배어있는 내셔널리즘을 진작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어, 국민문학같이 내셔널리즘이 스민 표현을 거부한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저자의 예감은 불길하다. 침략과 억압으로 장식된 부끄러운 과거역사가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민주주의는 멀고, 반목으로 위기와 절망이 깊어지는 이 시대. 저자는 이럴 때일수록 내셔널리즘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동포, 우리 가족, 우리나라 안에서 힘을 합치자는 구호가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자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루쉰에게 그 돌파구가 있을지 모른다. 루쉰은 민족이나 국민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혹은 인류를 시야에 넣고 절망과 맞서 싸웠다. 동아시아가 조금 더 평화로운 길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가 루쉰을 강조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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