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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개천서 용 나는 시스템 아니다

[아침을 열며]사시, 개천서 용 나는 시스템 아니다

1980년대 초 서울의 명문대 법학과에 들어간 고향 선배가 있다.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기억력이 비상하고 두뇌가 명석한 천재형이면서도, 책상에 한번 앉으면 3~4시간은 엉덩이를 떼지 않는 노력형이었다. 체력도 좋고 생각도 건전했다. 그러나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할 때가 돼도 그의 합격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후배들의 사법시험 합격 경축 플래카드가 동네 면사무소 앞 도로에 내걸려도 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고향에 갈 때마다 그의 소식을 물었지만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만 들렸다.

그 선배는 사법시험 1차에는 3차례나 붙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2차 서술형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받침이 작고 오른쪽으로 기운 필체를 고치기 위해 펜글씨 교본을 사서 연습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지금은 지방 중소도시에서 공인중개사 학원 강사를 하며 고시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눈높이를 낮춰 법무사 시험에도 도전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년이면 나이가 쉰이다. 5년만 젊었어도 로스쿨로 방향을 틀겠지만 20년 넘게 해온 고시 공부가 아까워서 다른 시도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

그 선배가 응시할 수 있는 사법시험이 이제 단 한 번 남았다. 내년 2월 말 마지막 1차 시험이 치러진다. 내후년에는 1차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는 2·3차 시험만 진행한다. 최종 50명을 선발하고 사법시험은 201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법조인 양성은 전국 25개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로 단일화된다.

하지만 요즘 사법시험을 존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법조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가장 주된 논리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을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다. 연간 1500만원을 넘는 로스쿨 등록금이 너무 비싸므로 사법시험을 유지해 저소득층의 법조계 진입을 보장하자는 취지이다. 그러나 과연 사법시험이 계층 상승 통로나 약자를 위한 희망의 사다리일까.

사법시험 공부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 대학 졸업 뒤에도 최소 3년은 각오해야 한다. 돈도 필요하다. 수험생 대부분이 월 수십만원짜리 학원 강의를 몇 개씩 들어야 한다. 생활비와 학비를 대주는 부모나 후견인이 필수적이다. 언제부턴가 사법시험 합격자는 외국어고를 나온 서울 강남의 부유층 자녀들로 채워지고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만 나온 사람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 사법시험의 최대 장점이지만 시험을 제한 없이 볼 수 있는 것과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로또 복권을 아무나 살 수 있지만 당첨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난 10년간 사법시험 합격자 7900명 중에서 고졸 이하 출신은 5명이다. 대졸자라도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합격자는 전체 응시자의 3% 선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불합격에 따르는 ‘리스크’는 너무 크다. 한 마리의 용을 위해 숱한 이무기와 고시낭인이 생겨나는,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대단히 비생산적인 인재 선발 시스템이다.

사법시험 합격자를 용에 비유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다. 사법시험 합격자가 용이 되려면 법률 소비자들은 ‘봉’이 돼야 가능하다. 사법시험 합격자를 떠받드는 문화가 있는 한 법원·검찰의 높은 문턱도 낮아지지 않는다. 사법시험 합격은 법률가로서 전문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줄 뿐,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연간 1000명 수준으로 늘어나고 로스쿨 출신 변호사시험 합격자가 1500명 이상으로 정해지면서 법조인들의 특권은 과거에 비해 줄었지만, 앞으로도 더 많이 줄어야 한다.

사법시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사법시험이 합리적이고 사회에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룰이 공정하고 노력한 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게임이라고 여길 수 있다. 힘들었던 수험 생활마저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개구리가 되면 올챙이 시절은 기억 못하는 법이다.

다만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도가 되고 있다는 사법시험 존치론자들의 비판은 새겨들을 만하다. 실력이 떨어지는 로스쿨 졸업생이 정·관계 실력자나 유력 법관의 자제라는 이유로 로펌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고 공직 진출에 특혜를 받는 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로스쿨 출신 변호사 중에서 올해 처음으로 경력판사 37명을 선발했지만 선발 기준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사법시험 존치나 로스쿨 축소가 아닌 로스쿨 입학과 졸업, 변호사시험, 판검사 임용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투명하게 해서 해결할 일이다. 사법시험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이 아니다. 사라지기 때문에 잠시 아쉽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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