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파동’이 낳은 엉뚱한 결과

김광호 정치부장
[아침을 열며]‘유승민 파동’이 낳은 엉뚱한 결과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찍어낸 ‘유승민 파동’은 임기 반환점을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 정권의 물리적 시간이 꺾어지는 3년차는 최고권력의 촉수가 예민해지는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은 절반의 미래를 위한 포석과도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 폭탄을 던진 것도 딱 이맘때다. 이명박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2010년) 카드를 꺼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2000년)을,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구속’(1995년)을 결행했다.

“우리나라 여건에서 대통령제가 가장 뿌리를 잘 내렸고, 대통령제하에서는 소선거구제가 제일 맞다.”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이던 2005년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는 ‘대연정’ 제안을 단칼에 자르며 내놓은 답이다. 당시 대연정의 조건이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이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제는 ‘통째 권력’도 마다할 만큼 지순한 가치인 셈이다. 이를 떠받치는 소선거구제와 양당 정치도 불변의 한국적 시스템이다. 적어도 2005년 ‘박근혜 대표’는 ‘대한민국=대통령제=소선구제’ 논리로 보수 지지층의 박수를 받았다.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의원은 지난달 30일 “진영논리에 갇혀 싸움만 일삼는 양당 중심 정치는 이제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선언했다. ‘유승민 찍어내기’가 한창이던 여권의 난장판 내전을 거론하며 한 말이었다.

이 같은 변화는 김 의원만이 아니다. 보수진영의 아이콘인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최근 칼럼에서 ‘대통령제, 수명 다했다’고 단언했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으면 정치도 바뀌어야 하고 통치체제도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정치론으로 시작한 칼럼은 “여야 정치권의 파열음 현상은 대통령중심제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고 정리했다. 중도성향 정치학자 강원택 서울대 교수도 언론 인터뷰에서 “내각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었지만 최근 입장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처럼 보수·중도·진보를 떠나 지식인 사회는 지금의 한국정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지식인 사회 ‘의식의 흐름’만 보면 박 대통령의 10년 소신은 균열에 직면했다. 더욱이 그가 주도한 ‘유승민내전’이 반전 기폭제를 제공한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발등을 찍은 꼴이다.

청와대·여당만 빼고 세상의 눈은 이미 크게 달라졌다. 사석에선 여당 정치인들조차 마찬가지다. “한국정치가 지금 목에 차 있다”고 토로한다. 그저 대통령이 무서워서 내놓고 말 못하고 있을 뿐인 게다.

돌이켜 보면 한국사회는 ‘두 쪽’뿐인 한국정치의 막장 재방송을 신물나도록 반복해서 봐왔고, 지칠 대로 지쳐있다. 1인 권력의 뿌리가 깊은 여권은 늘 청와대와 여당 사이 배반과 진압의 ‘궁중 암투’ 드라마에 익숙하다. ‘유승민파동’을 보며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김성곤 코털 뽑기’를 떠올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태생부터 계파들의 각축장이었던 야당에선 영화 <금요일밤의 악몽> 속편들처럼 ‘계파 잔혹극’이 반복된다. ‘친노·비노’의 분당 다툼엔 1976년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나, 2003년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과정의 ‘하이힐 폭행’ 영상이 오버랩된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를 향유하는 것은 컬러 TV를 넘어 UHD TV를 보는 지금이나, ‘흑백 테레비’도 없이 라디오에 일상을 의존하던 그 시절이나 동일한 셈이다. 더 이상 양당, 양 진영, 양 지역 체제의 정치는 유효하지 않다. 그런 정치를 가능케 하던 정치거인들도 사라졌다. 여당 한 정치인은 “정치가 데크레센도(점점 약하게)라고, 점점 줄어든다. 정치인들도 보잘것없어지고…”라고 했다.

지금 정치를 소비하는 총천연색 인간 군상들을 담기엔 ‘두 쪽 체제’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억지려 담으려 해봤자 그릇만 깨진다.

싫든 좋든 이제 한국정치의 체제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길은 다당제화, 이를 위한 소선구제의 개편, 더 나아가 대통령제 자체의 변화로까지 길게 이어질 여정이다. 그 출발점은 내년 총선을 앞둔 선거제도의 변화일 것이다. “정치가 국민들을 불안케 하는 시대”라는 본능적 불길함에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사항이 됐다.

역설적으로 여권의 ‘유승민내전’은 우리 정치의 현실을, 독한 암종에 걸려 죽어가는 대통령제와 양당제의 실상을 도드라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기득권에 안주한 정치가 외면해온 암종이다. 그것만으로도 ‘유승민파동’은 한국정치사에 ‘굵은 마디’로 남게 될지 모른다. 청와대가 저항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에 대항하려 할수록 그 마디는 더 도드라지게 될 것이다. ‘유승민파동’과 제1야당의 난투극이 만들어낸 전혀 엉뚱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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