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푸린 하늘은 금세 나무들로 가려졌다. 10분 남짓 올라왔을까. 7월18일 아침, 서울 종로구 평창공원에서 접어든 북한산의 첫 오르막 등산로에서 아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저쪽이에요.” 수풀 사이로 30m쯤 들어갔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때죽나무가 있었다. 꼭 100일 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세상을 뜬 자리였다.
나무엔 어느새 옹이가 지고 있었다. 성 회장이 발 디디고 손도 뻗어야 겨우 닿았을 가지 하나가 그를 수습하던 사람들 손에 부러져나간 흔적이었다. 5월 49재 무렵에 왔을 때 흰꽃이 폈었다는 때죽나무엔 작은 초록 열매들이 맺혀 있었다.
“찾았다”는 무전 소리에 경황없이 달려온 그날, 아버지의 몸에서는 모자·안경·넥타이·목장갑·구두·현금 8만원과 검찰이 가져가버린 ‘메모지’가 나왔다. 오른손에 꼈던 목장갑은 죽음을 작정하고 북한산에 왔음을 뜻했다. 현금은 죽기 전날 밤 아버지의 청담동 집에 들렀을 때 서재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지나쳤던 5만원권 지폐 2장에서 북한산까지의 택시비를 제한 것이었다. “참, 아이러니했어요.” 명품을 모르고 생전 걸치지도 않았다는 성 회장이 마지막으로 옷장에서 꺼내 든 것은 오래전 며느리가 유학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하늘색”을 골라 선물한 ‘에르메스’ 넥타이였다. 아버지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명품이라고 했다. “그걸로….” 아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왜 북한산이었을까요?” 아들은 동틀 무렵이나 일을 일찍 마치면, 1주일에 네댓번 아버지가 북한산을 찾았다고 했다. 그날도 1시간30분이면 왕복하던 국민대~형제봉 능선을 탔다가 평소와 달리 평창동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왔다고 했다. 오전 5시37분에 산행을 시작한 성 회장이 “일어났느냐”며 내게 전화한 것은 3분 후였다. 6시5분에 다시 걸려온 전화는 48분간 이어졌다. 아들은 아버지가 형제봉에 올라 통화가 시작됐고, 평창공원 가까이 내려왔을 때 끝났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버지 성품상 부장님과 인터뷰 마치고 바로 결행하셨을 거 같아요.”
그날 성 회장은 “꼭 좀 보도해달라” “맑은 세상을 만들어달라”며 6명을 거명했다. 허태열·김기춘·홍문종·이완구·홍준표·이병기 순서였고, 사람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도 달랐다. 돈을 전달한 사람까지 미리 만나보고 지목한 사람은 홍준표 경남지사, 2006년 유럽 방문을 앞둔 때라며 신문 보도일자까지 적어온 사람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 톤이 높았던 사람은 이완구 전 총리와 홍문종 의원이었다. 더 말할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성 회장은 “이것만 해도 여러 사람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다 압니다. (친박계)메인에서는…”이라고도 했다. 권력의 치부와 속살을 폭로하기에 충분한 실세의 면면과 숫자라고 생각했음직하다. 그날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산행 중에 손에 쥐고 있었을 메모지엔 유정복 인천시장과 ‘서병수’로 추정되는 부산시장이 더 있었다. 성 회장의 폭로는 ‘살아있는 권력’을 여럿 겨누면서도 돈을 준 정황과 단서가 달려 있어 유별나고 힘이 있다. 인터뷰 전날 밤에 “내일 새벽 녹음도 하라”며 “다들 내 돈은 편하게 믿고 썼으니까”라고 했던 말에는 권력의 치부를 폭로하겠다고 작심했던 결기가 보인다.
그랬던 '성완종 리스트'가 100일도 안돼 머리 잘린 삼손처럼 힘을 잃었다. 경향신문에 리스트가 한꺼풀씩 공개된 지 사흘 만에 ‘성역도, 한 점의 머뭇거림도 없을 것’이라며 나섰던 검찰은 81일 만에 이 전 총리와 홍 지사만 불구속기소하며 사실상 판을 걷었다.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며 말한 정치자금의 진위는 ‘2 대 6’으로, 비박과 친박으로 갈렸다. “증거와 공소권으로 판단했다”는 검찰의 말은 그날 ‘성완종의 메모에서 내 것만 사실이냐’는 홍 지사의 보도자료가 조롱해버렸다.
성 회장은 왜 죽음까지 직선으로 달려갔을까. 무일푼으로 시작해 평생 건설업체를 이끈 사업가였고, 마지막까지도 실망할까 걱정한 서산장학재단 장학생들을 두고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비장했던 그날의 인터뷰 말미에 단서가 보인다. 그는 말머리마다 “내가 희생되더라도” “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기업인이 나 하나로 끝났으면”이라고 전제했다. 그러고는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했나 나중에 아실 것이니 잘 다뤄달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진실과 진실의 고백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생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를 강박하고 그가 매달린 출구는 ‘진실의 무게’였다.
세월호가 그랬고, 국정원의 댓글·간첩조작·해킹 사건이 또 그랬다. 진실이 뒤틀리고 덮어지는 시대, 위정자들이 진실과 마주하길 겁내는 시대, ‘성완종의 진실’은 북한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