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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스님

  • 글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사진 안선영 사진작가

각자 비우면 돼, 세상은 공집합이야, 그 안에서 서로 인정해야지

서로의 관계를 선이 아닌 점이라고 생각해봐, 그럼 여유가 보여

옛날 우리 말에 ‘눈먼 말이 원앙새 따라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눈먼 말이 아무것도 모르고 앞에서 방울을 흔드니까 소리만 따라간다는 뜻이다. 우리도 혹시 서로 얼기설기 엮인 그 관계 속에서 요란한 방울 소리에 끌려 벼랑인 줄도 모르고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종림 스님은 서로를 묶고 있는 관계의 강도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보자고 제안한다. 그 느슨한 여유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를 끄는 저 끈 너머도 살피고, 세상도 점검하며 가자고 한다. 관계망에서 나오는 갈등과 억압을 줄여보려는 스님의 묘다. 종림 스님과의 대담은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있는 서울 안암동 대원암에서 이뤄졌다. 처마에 눈이 덮여있던 작년 12월과 무더위가 몰려오던 6월 두 차례였다. 스님과의 첫 인터뷰 속에서 얻은 하나의 생각이 이 기획의 제목을 만들기도 했다.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각자의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 오늘 세상이다. 그러하기에 내일의 세상은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이번 스님과의 대담이 어차피 순간마다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선택에 조금은 사려 깊은 마음이 담길 수 있는 기회로 작동되면 좋겠다.

지난 6월 서울 안암동 대원암에서 종림 스님이 동자승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종교와 뇌과학의 탐구 대상인 ‘마음’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6월 서울 안암동 대원암에서 종림 스님이 동자승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종교와 뇌과학의 탐구 대상인 ‘마음’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 세상에 질서 질서 하는데
그런 건 없어, 그건 다 과거야
우리는 오직 미래를 살잖아

▲ 문명은 발전이나 진보를 하지만
인간은 아니야, 태어남이 시작이지
그런데 불평등하게 태어나
교육의 출발점은 맞춰 줘야해
능력껏 살다 죽을 땐 평등해야지

안희경(이하 안)= 휴가철, ‘마음을 찾는 여행’이란 글귀가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종림 스님(이하 종림)= 지금 불교에서 마음 마음 그러는데, 나는 그런 식의 마음은 없다고 생각해.

안= 왜요? 스님들은 마음공부 하시는 분들 아닌가요?

종림= 없으니까 없지, 왜는. 나는 오히려 갈등을 찾았지. 괴롭잖아 뭔가 얽혀서…. 그걸 해소하기를 원한 거지. 마음, 도(道)가 아니라.

안= 갈등의 해소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나요.

종림= 그게 논리적 구조일 수도 있잖아. 어차피 이원(二元)이지. 생각하고 현실하고의 차이. 또 내가 생각하는 ‘나’하고, 지금의 ‘나’하고 어긋나는 거. 나는 그 갈등이 왜 나왔을까. 그 최초의 움직임, 그게 뭘까? 그런 식으로 들어갔지.

안= 스님, 일단 마음부터 찾고 갈등으로 넘어가면 안될까요?

종림= 없는 게 찾는다고 찾아지겠나?(웃음)

안= 과학자들은 마음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그렇게 보면 실체가 있죠.

종림= 마음이란 게 ‘뭔가가 작동하는 거다’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거는 인정하지.

안= 법정 스님께서는 내 안에서 들리는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고 했고, 또 미국의 샬롯 조코벡은 참선하며 앉아 있는 나의 몸, 이리저리 옮겨가는 내 생각들을 관찰하는 나를 인식하자고 했습니다.

종림= 그런 식으로 치면, 태어날 때 나와 같이 깃든 혼, 영, 정신 그런 걸 아예 떼어 놓고 생각할 수도 있어. 대신에 태어난 다음에 형성된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면 경험을 ‘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안= 제가 생각하는 상대는 내 프레임으로 비춘 이미지의 총합으로 다가왔어요. 거기에 비추어 ‘나’ 또한 실체가 없을 수 있겠구나 어림 짐작해 본 적이 있습니다.

종림= 응, 경험이지. 근데 그것도 내가 볼 때는 허상이라. 경험의 덩어리, 그것 가지고 ‘나’라고 그러면, 경험을 빼버리면 내가 없어질까? 경험을 빼버려도 그 혼은 남아. 기억을 잃어 버린 ‘나’는 있단 말야. 차라리 그런 식의 나라고 하면, 물질적인 변화, 작용 그걸 인정하는 게 낫지.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틀, 그것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확실성이 있다고.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틀! 그 정도 같으면 ‘나’라는 인간이라고 이야기해도 되지. 그리고 사람마다 그 틀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조금은 다르겠지. 태어난 것도 있고, 환경도 있고. 그 정도까지는 내가 양보하지.

안= 스님께서 없다고 하셨던 마음은 우리의 의식으로 드러나는 감정, 판단 이런 작용을 포용하면서도 뛰어넘는 어떤 본질을 말씀하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화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틀로서의 마음으로 좀 좁혀서 이야기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데요. 요즘 한국 불교에서는 ‘나’를 찾는다는 말을 합니다. 많은 호응도 얻고요.

종림= 그래도 찾기는 뭘 찾어. 찾는 게 아니지. 그냥 물은 물, 1은 1. 그걸 바로 보는 것이어야지. 나는 그래. 그러니까 있는 외부의 바깥 그것을 사실대로만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거다 이 말이여.

안=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잖아요. 다 자기의 감정, 환경, 경험, 이데올로기, 몸 상태 등 프레임에 갇히니까요.

종림= 맞아. 다 자기 프레임이야. 그러니까, 틀만 가지고 그 속에 쌓여 있는 경험, 판단 그 복닥이는 것을 싹 빼버린 상태에서 세상을 쳐다보자는 거야. 그러면 있는 그대로 반영되겠지.

안= 개인과 개인 관계에서는 힘들어도 감정이나 평가를 내려놓고 보겠다는 시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사회적으로 얽혀 있는 이 세상이나 권력의 움직임을 볼 때는 그러면 너무 나이브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림= 그거 같은 거 아냐? 사회적 관계도 마찬가지일 거 같은데. 사는데, 너하고 나하고 선으로 딱 엮여 있다면, 그 선을 끊기 전에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안되지. 자식하고 너하고 선 있잖아. 직선으로 당겨진 그 선. 그러면, 자식이 아프면 바로 연결이 될 거야. 그럼 너까지 상해. 상황을 볼 수가 없다고. 돌아보고 잘못을 고치고, 아니면 좀 기다려주고 하는 그런 여분이 없어. 그러니까 너하고 자식하고 관계를 선이 아니라 차라리 점점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해봐. 점으로 얽혀 있어도 관계는 있어. 그럼 봐, 점 하나가 (영향을) 줄 때마다 뉴런이 가지를 치듯이 다른 관계가 될 거야. 선은 쭉쭉 다 뻗어가는데, 점은 여기서 저기로 튕겨 갈 거고, 요렇게 틀어도 갈 거고…. (떨어져 있으니 우리가 대상을) 쳐다볼 수 있지. 그럼 나도 상하고 남도 휘둘리게 되는 그런 식의 직접적인 영향은 덜 받을 거야. 있는 대로 볼 수 있고. 그리고 봐봐. 똑같은 사물이라 해도 마음이 바뀌면 보는 각도가 달라지지.

안= 불교에서 말하는 ‘나’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과 이어지네요. 남을 바꾸긴 어렵지만 나를 바꾸면 나와 연결되는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말인데, 선으로 얽힌 그물이 아니라 점점의 망이라도 세상이 요동칠 수 있을까요?

종림= 물결이야 안 일겠나. 그러니까 마음이 달라질 때는 요 속에 그 마지막 각을 딱 트는 고 주체가 달라진다 그 이야기지. 그럼 비춰지는 세상도 바뀌지. 그리고 세상에 질서 질서 하는데 그런 건 없어. 질서란 서로 부딪쳐 만들어지는 거거든. 기존 질서에서 보면 새로 들어온 거는 다 혼돈이지. 그런데 기존 질서가 나온 데는 다 권력, 이데올로기, 관습 이런 것이 작용하거든. 과거의 것이란 말이지. 그런데 봐, 우리가 사는 건 아직 오지 않은 것, 앞에 것, 미래잖아. 이건 아직 여기 없는 거라고. 없는 걸 왜 있는 걸(기존 질서)로 보고는 그르다고 하고 나쁘다고 하는 거야.

안= 그러려면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가 있어야겠네요. 그럼 소외, 갈등도 좀 녹겠어요. 사회적으로 나아지는 변화를 하려면요? 다수가 편한, 무리가 없는 세상, 적당한 합의….

종림= 그건 다수를 쫓는 다수결이지. 너 나 해가지고 여기 있는 셋이서 합의만 되면, 나는 소를 잡아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우리 사는 데서는 최선이지.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나쁜 놈 셋이라면 좋은 거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교집합이 아니라 공집합이야. 셋 모두 마음을 비우면 다 포개질 수 있지. 공집합 같으면 열 개를 합해도 공이라. 안에 있는 사람이 다 인정하는 세상인 거지.

안= 굳이 한마음을 할 필요가 없이 각자가 자기 뜻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네요.

종림= 그렇게 각자 비워도 사회하고 똑같이 모일 수 있어. 이것도 집합이지. 그러니까 이념이든지 관념이든지, 내용을 빼버린 거. 그러면, 세 개가 이래 갖고 한 집합으로 가는 거지.

안=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존인가요?

종림= 그럼, 다양성을 인정해 주면 되지. 그리고 최소한으로 추구할 수 있는 선을 그어주는 것. 그래서 나는 불교에서 공을 설명하는 것이 여기 공집합에 딱 떨어진다고 여겨. 백 개를 더해도 그래 봤자 0이라. 0이지만 하나야.

안= 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세상에서 존재하며 그 세상들이 다 합쳐져도 살 만하다는 건데요. 그런데 어떻게 비워낼까요? 저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선생이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르네상스, 문예부흥, 인본주의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건 당시에 느닷없이 수많은 천재들이 나와서가 아니라 시대가 그 천재성이 드러나도록 개인들을 품어서, 자유로운 정신이 예술로 문학으로 또 사상으로 꽃피워질 수 있었다고요.

“각자의 생각이 모여 오늘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종림 스님의 말씀은 이 연재의 제목이 됐다. 사진은 최근 대원암에서 만나 두 번째 대담을 하는 종림 스님과 안희경씨의 모습이다.

“각자의 생각이 모여 오늘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종림 스님의 말씀은 이 연재의 제목이 됐다. 사진은 최근 대원암에서 만나 두 번째 대담을 하는 종림 스님과 안희경씨의 모습이다.

▲ 욕망을 없애면 안돼
아무 대가가 없어도 하고 싶은 것
그런 게 있어야 살 맛이 생기지
욕망을 살리는 게 바로 ‘공’이야

▲ 경험·판단이 ‘나’를 조정하잖아
틀 안에서 복닥거리는 내용들
그것을 싹 빼버린 상태에서
틀만 가지고 세상을 쳐다보면 돼
그게 마음 다스리는 거야

종림= 그 정도로 말하는 것도 맞기는 맞을 거야. 만일에 지금 이 세상에 철인이나 도사가 나타났다고 해봐. 내가 생각할 땐 그래. 지금 들을 놈은 아무도 없고 지꺼릴 장도 없을 거야. 아마 그놈이라 해도 혼자 농사짓고 살 거야. 들을 귀가 있어야 듣지. 그러니까 그런 게 먹히는 장이 되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품는 사회적 분위기는 맞아.

안= 어떻게 하면 그 장을 펼 수 있을까요? 개인이 밝아지면 전체가 밝아질 수 있나요?

종림= (웃음) 맑은 개인이 모이면 맑은 게 되지. 근데, 개인 개인이 다 하기는 안 어렵겠나. 나는 문명은 진보나 발전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인간은 나아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도덕에는 진보가 없어. 되풀이라. 그래서 나는 이런 거 하고 싶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게 태어나.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자. 머리 좋은 놈, 나쁜 놈. 평등이 어딨냐? 없어. 어차피 불평등이 주어지는 거면, 거기서 두 개만 지키면 될 거 같은데. 이미 태어나는 출발점은 다르잖아. 하지만, 교육의 출발점은 난 똑같이 줬으면 좋겠어. 그 다음에는 각자 능력껏 살고. 또 죽을 때 평등하게 하면 되지.

안= 어떻게요? 상속세?

종림= 그걸 아주 강화시키면 되지. 그걸 이쪽에 교육비로 쓰든지. 사회 출발점은 동등하게 하자. 그곳에서 빨리 가는 놈, 느리게 가는 놈 나올 수 있지. 그 다음은 자유스럽게 살게 놔두고. 죽을 때 그걸 공적인 것으로 돌리면 되지. 능력이 다르고 그런 거야 할 수 없지. 출발점하고 마지막 점 그거는 어느 정도 평등하게 맞춰줘야지. 그래야 가죽 오려서 뭔가 만들고 싶은 마음도 들고. 돈은 안된다 싶어도 누군가 보고 좋구나 여겨지면, 또 거기서 돈 되는 데로도 갈 수 있는 기회도 얻고, 그리 재미난 세상이 돼야지.

안= 근데, 좀 억울하지 않을까요? 내가 열심히 해서 이만큼 모아 놓은 것은 자식들 먹고살게 해주고 싶은데.

종림= 그거는 이기주의지. 원래 자기 능력으로 그만치 된 것도 있어. 근데 봐, 돈 벌 때는 국가의 기반이든지 주위 사람이든지 다 서로 도움이 축적된 거지. 개인이 뛰어봐야 얼마나 되나.

안= 앞서 점선을 이야기할 때, 다음 위치로 이동해서 관찰하며 그 다음 지점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공간에서 밀려오던 관성을 끊고 틀 수 있다는 건데요. 욕망을 제어하고 이성을 살려내서 나간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종림= 그런데 우린 개인적인 욕망은 절제해야 하고, 불교에서도 욕망을 없앤다 하잖아. 하나, 실제 그 욕망을 살아나게끔 하는 게 바로 ‘공’이야. 욕망을 없애면 안돼. 없애는 건 아니야. 돌멩이는 욕망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그게 우리가 보는 가장 좋은 깨달은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욕망은 살려줘야 돼. 돈을 위해서 또 남을 위해서 남의 일을 해주는 것, 보통 우리 삶이 그렇게 돌아가잖아. 그 속에서도 ‘아니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겠어’ 그리고 뚝딱거릴 거야. 근데 그건 또 실제 돈이 안되지. 그런데, 다른 누가 보고는 ‘어 재밌네’ 그럴 수 있단 말야. 그놈은 지 재미로 하는데 다른 사람이 좋아서 돈 주고 사고, 그럼 또 세상이 바뀌는 거라. 그런 욕망,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그거지 뭐. 그러니 대가를 안 바라고 남한테 피해도 안 주고 내가 하고 싶은 일, 거기서 살판이 생기는 거고.

안= 활기 있게 공존하도록 하는 욕망을 살리는 시스템, 그 공집합이 요즘 시절에 더 갈증으로 다가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 그 탐욕은 어떻게 하나요? 욕심을 좀 덜어내야 남들 사는 것도 보이잖아요.

종림= 그거 맞아. 그것도 비우는 거야. 도움은 되지. 우리가 말하는 사회사업 있잖아. 지금 이렇게 도덕적인 사회사업이 종교의 본류인 것처럼 하는데,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사회도 유익하고 본인도 만족감 같은 거 느끼고 그럼 좋은 일은 좋은 일이라. 그렇다고 그걸 종교의 주된 일이라고 끌어올리는 건 그건 아니라고 봐.

안= 종교의 주된 일은요?

종림= 몰라. (웃음) 불교에서 이야기하면 그렇지. 탐은 물건하고의 관계, 보통 감각하고의 관계라. 좋은 거, 따뜻한 거, 편한 거. 그건 밖의 물하고의 관계고, 그게 기본 욕망이지. 탐진치할 때, 진은 대상과의 사이에 생겼다고 해. 성내는 거. 진은 네가 잘해도 저거 꼴보기 싫다 그럴 수 있어. 그건 대상보다는 나한테 문제가 있어. 도덕적으로 자제를 하면 어느 정도 돼. 도덕주의자로, 그걸로 해결하면 돼. 그러니까 불교에서 한다고 하면 무지를 깨우쳐줘야지. 세상을 쳐다보는 눈. 무지는 바로 보게 해주는 거지, 밖의 것을. 그러면 보통 아등바등 나를 해치지는 않아. 그래 세상을 바로 쳐다보게 해주는 거지.

안= 우리가 보는 틀이라고 ‘나’를 규정했는데요. 그래서 말인데요. 죽으면 마음 혹은 ‘나’가 사라지나요?

종림= 없어지지 그러면 어디 가나? 왜? 있어야 되는 거야? 어차피 우리는 이렇게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잖아. 흩어진 한 쪼가리 그거를 ‘나’라고 할 수 있나?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여기에 모인 상태잖아. 죽으면, 모인 상태가 조건이 달라져 흩어지는 거잖아. 흩어지면 이래 갖고 파편을 ‘나’라고 이해할 수 없는 거고. 해체되면 없는 거지.

안= 다 흩어져도 어떤 핵심의 뭔가는 다음 생으로 이어지지 않나요? 아쉬운 생각이 드는데요.

종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흩어진 쪼가리가 다 남아 있지, 그게 어디 가나. 내 쪼가리. 그럼 그 수소 쪼가리 산소 쪼가리가 나야? 그건 수소지.

안= 그럼 뭐하러 수행하고 뭐하러 다음을 위해 닦고 그래요? 지배 이데올로기인가요?

종림= 그런 질문의 기본 전제가 뭐냐면, 이것이 있어야 편하고, 그게 있어야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안= 바라는 거죠. 저 너머에 있을 평화를요.

종림= 그거는 질문하는 전제가 틀렸지. 있어야 하고 있는 걸 찾는 게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거는 없는 걸 찾는 거 그걸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와 똑같아. 왜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찾아야 하냐? 그 환상에 우리가 다 놀아나는 거지. 없어도 괜찮다,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요 있는 것 하나하나가 다 나한테 확확 닿겠지, 오히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전제 그거부터 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안= 세상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중년도 나름의 불안이 깊고, 젊은 친구들은 또 무기력에 빠져 있다고들 합니다.

종림= 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아픈 건 할 수 없는 거야. 아픈 걸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못 벗어나거든. 그런데 아파할 만한 것 가지고 하면 되지. 그건 좀 생각을 해야 할 거고. 그래 그 고민이야 살아있는 고민이지. 엉뚱한 것 가지고 고민하잖아. 그건 헛고민이지.

안= 뭐가 엉뚱한 고민이죠?

종림= 아마도 그걸 거야. 내 고민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것에다 내 고민을 집어넣는 것. 어차피 우리는 힘든 건 다 마찬가지인데,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 돼. 내 하고 싶은 거. 거기다가 내 고민 노력을 집어넣어야지. 그러다가 당하는 건 할 수 없는 거지. 근데, 다 엉뚱한 데다 투자를 하고 있잖아. 돈 버는 거. 돈 벌어서 뭐할 건데? 뭐할 건지 아무도 생각 안 하잖아.

대담을 마치고도, 마음은 없다는 스님에게 미련이 남아 엉뚱하게 돌려 물었다.

“스님, 그럼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뭐예요? 틀을 없애는 건가요?” 여태껏 듣고도 뭐했느냐는 듯 대뜸 호통이다. “내용을 없애야지 틀을 없애나….” ‘아이고 이 답답아’라는 말은 스님의 입속으로 말려들어갔다. 그리고, 스님은 내가 던진 그물에 걸리셨다. 자상한 설명이 술술 이어졌다.

“내가 경험하는 거 좋아하는 거… 그게 나를 조정하잖아. 날 움직이잖아. 그거 없이 틀에서 그 안의 내용들이 복닥복닥 노는 것을 쳐다보면 그게 마음 다스리는 거지. 틀의 입장에서 보면 되지. 틀의 입장에서 아 이놈은 이리로 가는구나 저놈은 저리로 가는구나, 그래 그렇구나 쳐다보면 그게 다스리는 거 아닐까?”

안암골 대원암엔 정오에도 산새 소리가 왁자했다.

■ 종림 스님은
고려대장경 전산화 주역… 서구철학·과학에 조예


[문명, 인간이 만드는 길 - ‘마음’ 전문가들과의 대화](8)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스님

종림 스님(71)은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이다.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지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도서관장, 월간 ‘해인’ 편집장, 일본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대흥사 선원장, 세계전자불전협의회 공동의장, 2006 한국불교학결집대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2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설립하고, 1996년에는 세계 최초로 고려재조대장경을 전산화한데 이어, 초조대장경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2013년 불이상을 수상했다. 스님은 불교의 유식뿐 아니라 서구철학, 진화론, 뇌과학, 인지과학에도 관심이 깊다. 하버마스와 같은 서양 철학자와의 대담이나 과학자들과의 토론에도 단골로 초대돼 세상을 논해왔다. 대장경 전산화가 진행될 당시 한 인터뷰에서 스님은 “나의 가장 멋있는 모습은 고원의 벌판에서 괭이 들고 땅 파다가 석양을 바라보는 그림입니다”라고 했듯,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또 문명의 이동에서 변화의 길을 모색해 왔다. 이제는 스스로를 공(空)의 자리에 두고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 인간 사는 모양을 해석해 보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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