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트렌드vs클래식]진정한 사치, 혹은 휴가](https://img.khan.co.kr/news/2015/08/12/l_2015081301001741800152212.jpg)
7년 전 일이다. 한 항공사 상무가 신인류로 떠오른 젯셋(jet-set)족에 대해 얘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2~3년 전만 해도 ‘여행=여름휴가’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1년 내내 여행 중입니다. 둘 중 하나인 겁니다. 여행하고 있거나 여행 준비를 하고 있거나.”
그때만 해도 나 역시 굳이 분류하자면 젯셋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1950년대 말 제트 비행기가 출현했을 때, 이걸 타고서 세계 각국을 유람 다니던 부유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년 내내 어느 때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으로서의 젯셋족으로. 여하튼 그때만 해도 누구나 젯셋족을 꿈꿀 수 있었고 세상은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종종 젯셋족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은 기사가 잡지나 신문에 실리는 걸 종종 본다. 그걸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이제 좀 유행이 지났어. 그렇지 않아?”라고 조소하던 칼 라거펠트 생각도 나고.
어떤 인문학자가 ‘진정한 사치가 젯셋에서 트랙팩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돼버렸다.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인간답게 머물며 보다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자고 싶은 이들의 캠핑 트렌드가 무섭게 번지더니 이제는 그것조차도 번거롭고 피곤하고 식상해진 것일까?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라는 인식 아래 금쪽 같은 여름휴가를 빈둥빈둥 집에서 보내겠다고 선포하는 ‘스테이케이션족’들의 숫자가…. 거의 과반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스테이케이션’은 2015년 만들어진 신조어다. ‘머무르다’는 뜻의 ‘스테이(stay)’와 휴가를 뜻하는 ‘베케이션(vacation)’을 합성해서 만든 새로운 단어. 물론 새로 이름 지어졌다고 그 존재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짧게는 집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 ‘홈캉스족’의 일원이었던 그들이고 더 멀리는 자기들만의 동굴 속에 머물며 자족하던 원시 인류의 후예인 그들이다.
젯셋족에서 원시 인류로 거슬러 올라가니 누군가는 이 사태를 불황이 가져온 우리의 불운이며 퇴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루소가 썼듯이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해 도시 문명으로 진보해온 게 결코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가 매우 정확하고 단순했던 원시시대의 자연인 상태로부터 우리 영혼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이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선사인들은 여행이나 쇼핑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몰랐고 신문이나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파악하고 또 자족했을 거라고 루소는 추측하고, 나는 무릎을 친다.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의 정직한 고백이 그렇다. 그렇게 많은 곳을 여행했고,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그렇게 많은 물건을 사들였는데 그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낀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특히 여행이라면 남부럽지 않을 만큼 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면 더 행복할 것 같았기에, 과연 그런지 내 몸으로 경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비용을 치르고 나서야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고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파스칼의 이 경구가 부적처럼 나부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신의 방 안에서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없다는 한 가지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축하받아 마땅하다. 이제 우리 모두 여행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나 자기 집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쉴 수 있게 됐다는 사실 말이다. 젊은 직장인들 중심이긴 하지만 이제 그 절반이 휴가를 집에서 조용하게, 그것도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니 얼마나 고무적인가? 아무나 자주 할 수 없는 여행 관광객으로서 허겁지겁 세상을 헤매는 대신, 내 집에 앉아 내가 가진 것들을 음미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휴식이고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최고의 휴식은 아무 걱정 없이 자는 거다. 시체놀이 하듯 자는 거다. 그동안 유능하고 쓸모있는 인간 행세를 하느라 몸과 마음이 그토록 지쳤으니 최대한 무능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보는 시간, 그게 휴식이다. 그렇게 자다 자다 지치면 배를 채우고 책을 좀 읽거나 산보를 하다가 밤이 되면 영화를 틀어놓고 또 자는 거다. 물론 그래도 괜찮다.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밖에 없다는 에머슨의 말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