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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거나, 당당하거나

입력 2015.09.02 20:52

수정 2016.05.3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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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전유성은 20년 전인 1995년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라는 책을 펴냈다.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제목만은 기가 막히게 달았다는 출판계의 평이 많았다. 책은 출간된 지 얼마되지 않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제목 덕만은 아니었다. 책은 어쭙잖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다. ‘규범적이고 가치있는 삶’에 대한 장광설도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화법으로 세상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까발렸다.

[정동에서]비겁하거나, 당당하거나

전유성의 책 제목대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거울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인생이 즐거우려면 조금은 비겁해져야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낯이 두껍고, 뻔뻔하면 남의 자리를 내 자리로 만들 수도 있다. 의원 배지를 단 분들이 그랬다. 새정치민주연합 윤후덕 의원은 변호사인 딸을 LG디스플레이 법무팀에 취업시키려 청탁전화를 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새누리당 김태원 의원도 아들을 정부법무공단에 취업시키려 평소 가까운 사이였던 공단 이사장에게 청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 의원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같은 당 이주영 의원도 로스쿨을 졸업한 딸이 지난해 5월 네이버에 인턴으로 뽑힌 뒤 11월 정규직 사내 변호사로 채용됐지만, 당시 네이버는 정식 채용공고를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특혜 의혹이 불거졌다.

부모가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을 회피하는 비겁한 일이다. 자녀에게 ‘뒷문 입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거울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부모들로 인해 취업 기회를 빼앗긴 청년들의 입에서 “줄 없고 빽 없으면 서러운 세상, ‘헬 조선!’ ”이란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법하다. 그들에게 “비겁의 대가로 누리는 즐거운 인생은 한없이 경박하며,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란 얘기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되레 세상물정 모르는 ‘공자님 말씀’이란 핀잔만 돌아오기 십상이다.

편법 또는 꼼수를 쓰는 것도 비겁한 일이다. 하지만 찰나의 비난과 눈총을 견뎌내면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재벌그룹 총수들이 그렇다.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5억원 넘는 연봉을 받는 상장기업 등기임원의 보수 공개가 의무화되자 30대 재벌그룹 총수들이 계열사 세 곳 중 한 곳의 등기임원직을 사퇴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봉공개 의무와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은 피하면서 수십억~수백억원의 보수는 챙기겠다는 심산이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서 ‘열혈 형사’ 서도철은 “잘 살지는 못해도,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고 말한다. 영화는 비겁과 즐거운 인생을 맞바꾸려는 인간 군상들의 추레한 모습을 비춘다. 돈 앞에서 비굴해지고, 딸의 연주회와 아들의 취업 청탁을 위해서라면 불의와 결탁할 수도 있는 경찰과 검찰 간부에게 서도철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느냐”고 ‘돌직구’를 날린다. 서도철의 아내 주연은 명품 가방에 돈다발을 넣어 회유를 시도하는 재벌가의 하수인 최상무에게 “맨날 이렇게 돈으로 휘두르는 거 식상하지 않아요?”라고 무안을 준다. 그리곤 서도철이 근무하는 광역수사대에 찾아가 “명품 백을 보고 흔들리더라. 그런 내가 쪽팔리더라”고 쏘아붙인다.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비겁하지 않고, ‘가오’ 잡으며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불임금 420만원을 받기 위해 찾아온 화물트럭 기사에 잔인한 폭력을 가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한 죄과를 덮으려 경찰에 외압을 넣고, 광고로 기사를 막으려 하는 재벌가의 비열한 행태가 ‘가오 잡고, 즐거운 인생’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껏 조롱하기도 한다.

눈물과 한숨이 있더라도, 당당하고 떳떳한 삶의 모습은 임흥순 감독의 다큐 영화 <위로공단>에 녹아 있다. ‘나이키’ 공장에서 일했지만 월급으로 ‘나이키’ 신발 한 켤레를 살 수 없었던 ‘공순이’, 밀폐된 봉제공장에서 먼지와 실밥에 파묻혀 미싱을 돌렸던 ‘시다 출신 엄마’, 먹을 것이 널려 있고, 잘 닦여 광택 나는 탁자가 많은 매장이 아닌, 더러운 바닥에 박스를 깔고 앉아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우는 ‘대형마트 이모’,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전화를 받고,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콜센터 언니’….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누군가의 엄마이자 언니·누나·동생이고, 딸들이다.

그들은 줄도 없고, ‘빽’도 없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지 않지만 비겁하지는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과도 같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조금만 당당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인생이 즐거우려면 조금은 당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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