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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 기쿠치, ‘칼’로 명성황후 죽이고 ‘펜’으로 식민사관 심어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하지연 지음 |서해문집 | 304쪽 | 1만5000원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0월8일 새벽, 기쿠치 겐조(1870~1953)는 흥선대원군이 탄 가마를 호위하며 일본 낭인 수십명과 함께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쿠치 일행은 명성황후를 찾아내 살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기쿠치는 일본 구마모토 출신 낭인이다. 낭인이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조슈번 출신이 아닌, 그래서 관료가 되지 못한 무사를 일컫는다. 일본 무사계층은 조선시대 사대부에 준한다. 이들은 막부체제를 떠받친 식자층이었다. 1만엔짜리 지폐 속 인물 후쿠자와 유키치도 무사 출신이었는데, 기쿠치 또한 상급 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출세의 길이 좁았던 낭인들은 일본 밖으로 진출했다. 일본 정부는 해외로 나간 낭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인접 국가의 국정을 농단했다. 낭인은 일제의 식민지 개척 척후병이었던 셈이다.

[책과 삶]낭인 기쿠치, ‘칼’로 명성황후 죽이고 ‘펜’으로 식민사관 심어

기쿠치도 같은 임무를 띠고 조선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을미사변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을미사변에 관여한 죄로 잠깐 동안 히로시마 감옥에 갇혀 지냈는데, 이때 <조선왕국>이라는 역사서를 썼다. 이 책에는 을미사변에 대한 변호를 비롯해 식민사관의 기초가 되는 기자조선설,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한다. 또한 조선은 한 번도 독립한 적이 없으며, 3000년 전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적었다. 저자 하지연씨는 <조선왕국>을 식민사관의 전형이라고 평가한다.

기쿠치는 또 흥선대원군 인터뷰를 바탕으로 <대원군전>을 펴내기도 했는데, 조선 근대사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사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구한말 하면 반사적으로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암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기쿠치 영향이 크다. 그는 고종을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한 나약한 군주로 평가한다. 대원군은 며느리를 죽인 냉혈한으로 “티끌만큼도 영웅과 위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고상한 성정을 찾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런 인물평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하씨는 이를 식민사관의 허다한 잔재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기쿠치는 해방 후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한반도에 머물며 언론인·역사 저술가로 활동했다. <조선잡기> <근대조선이면사> <근대조선사> 등 그가 쓴 역사서는 조선인을 외세 의존적이고 파당적이며 미개한 백성으로 규정하는 멸시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기쿠치는 관변 사학자였다. 일본 정부가 그의 저술활동을 지원했다. 따라서 집필의 초점은 식민지 침략 정당성 설파에 있어야 했다. 또한 친일파 조선 관료는 그를 고종실록·순종실록 편찬위원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기쿠치의 사례는 역사 집필 사업을 정부와 관이 주도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조선왕국>은 큰 인기를 얻었다. 쉽게 쓰인 까닭에 조선인 대중의 호응이 컸던 것이다. 이 무렵은 조선인에게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개념이 한참 낯설 때다. 조선인은 그로부터 10~30년을 기다린 후에야 박은식, 신채호의 역사서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왕국>을 비롯한 일제의 역사서가 한반도 역사 논의를 선점해버렸다. 식민사관은 한일합병보다 먼저 도착했고, 제국 군대보다 먼저 조선인 의식 속에 진격했던 것이다. 기쿠치 겐조는 그 선두에 섰던 일본 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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