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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에 부쳐

입력 2015.11.30 10:48

수정 2015.12.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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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미리 |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경향신문 뉴스큐레이션사이트 ‘향이네’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기획에 참여한 필자들은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학문이자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페미니즘이 뭐길래’ 함께 읽어보시죠. 연재글 의견은 h2@khan.kr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남성진보논객과 담론헤게모니: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 폭로에 부쳐

· 청년진보논객의 데이트폭력 폭로 사건

2015년 6월 ‘청년진보논객’으로 호명받아온 남성의 전 여자친구가 과거 연애 시절 데이트폭력을 SNS를 통해 폭로했다. 며칠 뒤 첫 번째 폭로에 용기를 얻어 폭로한다는 두 번째 증언이 이어졌다. 그들은 이같은 일이 운동사회 내에서 다시 발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후 세 번째 폭로가 이어졌다. ‘청년논객’은 아니지만 영향력 있는 노동운동가이기에 이를 둘러싼 세간의 관심이 컸다. 일련의 폭로과정에서 피해자 지인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가해자 지인 중에서도 가해자의 성찰을 돕겠다라는 이가 나오기도 했다. 세간의 관심 집중에다 언론보도까지 나오면서 잠시 소란스러웠지만, 이후 이 일은 이상하게도 빠르게 잊혀졌다. 폭로글과 지지글 등이 빠르게 삭제되고 지지자들의 글도 삭제됐다.



‘청년진보논객’ 전 여자친구들의 데이트폭력 폭로로 올 여름이 ‘잠시’ 시끄러웠다. 폭로 이후의 소란스러움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썰물처럼 사라졌고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그때를 아련하게 만들었다. 고요해진 세상은 시끄러움이 사라진 경로와 연유를 물어왔다. 그 소란스러움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무엇이 되었을까.

[정리뉴스][페미니즘이 뭐길래]4회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에 부쳐

1. ‘고로, 페미니즘에 위탁한다’

피해자들의 폭로글을 포함해서 데이트폭력 관련 기록들은 빠르게 삭제됐다. 사건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황급히 줄어들었고, 정치적 사안에 민감했던 논객들도 애초부터 이 일에는 무관하다는 듯이 발언을 삼가고 글을 멈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페미니스트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분위기는 또 그렇게 묘하게 흘러갔다.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는 않다. 진보진영에서 여/성폭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입(만)을 바라봤고 이것은 종종 페미니즘에게 신뢰를 실어주는 듯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 진보매체로 알려진 온라인 뉴스신문도 여성단체 인터뷰로 6월의 소란을 갈음했다. 데이트폭력 폭로 이슈를 비교적 발 빠르게 다루었던 한 주간지 편집장도 ‘여성’ 기자에게 관련 기사를 일임했음을 서두에 밝혔다. 편집장의 글마저도 ‘여성 기자’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고백도 남겼다. ‘나는, 어쨌든, 남자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렵게 편집장의 글을 써내려간 그는 ‘남자가 모르는 그 세상에서 끔찍했던 개별의 경험을 투사’하는 여기자들의 분노를 보면서 자신도 과거에 그랬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글이 마지막에 ‘나는 좋은 사람인가?’를 물었다. 그런 그의 글은 가볍지 않고 조심스러우며 성찰적이다. 그 피해가 사실인지, 꼭 그런 방식이었어야 했는지, 그렇게까지 해야하는지를 두고 피해자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좋은 사람인가’라고 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해자를 향했던 질문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바꾸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편집장을 평하는 일은 그래서 쉽지 않다.

한겨레21 제1068호 만리재에서 ‘잘 써야 한다’.

한겨레21 제1068호 만리재에서 ‘잘 써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판단 중지’ 유형의 성찰만 십수년 째 봐야하는 입장에 있다 보면 중지는 그쯤하고 ‘판단’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너무 ‘중지’만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페미니즘을 신뢰하다 못해 페미니즘에(만) 의지하는 이런 오래 묵은 관행은 결국 여/성폭력을 오롯이 페미니즘만의 책임으로 가두고 결과적으로 ‘여자들만의 문제’처럼 판을 키워왔다는 ‘판단’을 해주었으면 싶다. 이런 방식은 페미니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시급한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 방기라는 것도 직면했으면 한다. ‘나는 어쨌든 남자’이기에 페미니즘에 위탁한다는 태도는 정치사회적인 이슈마다 목소리를 높여온 논객들이 유독 여/성폭력 이슈에 입을 닫는 일을 정당화해주는 기재가 되어왔고, ‘여성폭력 나빠요’라는 선언적 수준에서의 합의 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의 문제로 타자화한 결과는 페미니즘을 타자화하고 물신화하는 결과로 이어져왔으며, 급기야는 ‘(이상한/외골수/파쇼/현재의) 페미니즘이 문제인 것’으로 귀결되어 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런’ 페미니즘 안에 ‘나’는 없으니,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무관할 예정이니 ‘너희’들끼리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지표명은 이번 ‘청년진보논객’의 데이트폭력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흔하게 일어났다.

참다못한 젠더연구자들이 이제는 대놓고 ‘남자들은 왜 나서지 않는가’라고 물으며 나설 것을 요청했지만 그것을 들어야할 이들은 듣지 않거나 침묵했다. 이 글을 쓴다고 해서 남성논객이 태도를 달리할지도 미지수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글을 쓴다. 페미니즘을 적대가 아니라 설렘과 기대로 만나는 논객들도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또) 한번 품어보기로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지인이자 청년논객이기도 한 김민하의 글을 보며 이 글을 써볼 엄두를 냈다는 걸 이 참에 고백한다. ‘가해자의 곁에서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고파했던 연대의 손짓이었다.

[정리뉴스][페미니즘이 뭐길래]4회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에 부쳐

2. 오래된 판단중지, 젠더에 한해서 사유를 멈추는 남성연대

소란했던 6월을 기억해내면서 지금의 고요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에 위탁한다 식의 해묵은 판단중지와 젠더에 한해서 ‘진보하기’를 저어하는 진보남성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하모니’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남성들의 판단중지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은 그런 ‘버티기’에 대한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집단적인’ 판단중지는 판단을 중지했다기 보다는 데이트폭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집합적 판단’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6월의 소란스러움을 가라앉히는 일에 적잖이 기여했다. 반(反)페미니즘의 정서 속에서 (남성) 논객들의 집단적 판단중지는 자기성찰을 독려하는 시간으로 구성되기 보다는 ‘잘못된’ 페미니즘에 대한 침묵시위의 기능을 수행했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남성논객의 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폭로 직후 피해자 책임을 지적하는 글이 올라오자 ‘현실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일침한 금태섭(▶데이트 폭력 피해자에 대한 훈계), 그 무지에 대하여, 스웨덴 출신 만화가 오사 게렌발의 만화 <7층>을 소개하며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은 여성들이 7층에 서있다고 호소한 박인하(▶[별별시선]‘7층’에 선 여성들), 좌파의 지적인 것과 인격적인 것의 부조화를 문제삼으면서 가해자 중 한 명의 ‘자기파탄적 해명글’을 예시한 김규항(▶[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포스트모던에의 질문) 등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번 폭로전에 개입했다. 금태섭은 누구보다 빨리 피해자 비난을 멈추는 일에 힘을 보탰고 박인하는 한국 사회에서 데이트폭력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 김규항은 아쉬운대로 가해자의 잘못된 대응방식을 문제 삼은 유일한 논객이었다. 이런 칼럼은 남성들이 데이트폭력 사건을 앞에서 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들이다. 하지만 그런 유의미성과 별도로 이 칼럼의 필자들이 더 날이 서고 더 성찰적인 글을 써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일반론을 (이제는 좀) 넘어서서 폭력과 연루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는 다른 식의 질문은 불가능하냐는 거다. 이 칼럼들은 논쟁이 끝난 이야기를 한번쯤 환기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정작 진전시켰어야 할 논의를 중도에 포기했다. 말하자면 폭로 초기에 으레 있는 당위적인 말들의 배치였고 논객들이 챙긴 일종의 ‘예의’였다.

스웨덴 여성 만화가 오사 게렌발의 ‘7층’은 실제 증언과 보도를 담은 데이트폭력 고발 그래픽 노블이다.

스웨덴 여성 만화가 오사 게렌발의 ‘7층’은 실제 증언과 보도를 담은 데이트폭력 고발 그래픽 노블이다.

‘남성’으로 살아온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겠다는 이들과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안전한 범주를 고수하며 맴도는 말들을 끌어내지 않겠다는 논객들은 이후 데이트폭력 폭로를 둘러싼 침묵의 연대에 합류한다. 데이트폭력 폭로 이후에 국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굳건한 침묵이 꾸준히 유지될 수는 없다. 개입을 꺼리는 정서가 이들에게 깊이 공유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공식/비공식적으로 폭로 이후 가해자들의 근황과 사건의 변화되는 추이를 듣곤 하겠지만 공적 논의의 장으로 이것을 들고 오는 이는 없었다. 침묵이 위력을 발휘하는 때에는 바로 이런 때다. 그들이 침묵으로 만들어낸 것은 데이트폭력이라는 문제의 삭제다. 침묵의 연대는 ‘호기로워’ 보이던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명예훼손 운운 그 한마디에 몸을 웅크리고, 행여 지인들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하며 다시 활시위를 (스스로를 향해) 당기는 일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해결, 책임, 뒷감당(?)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탁됐다.

침묵의 연대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젠더화된 ‘연애’를 과소평가 하(려)는 진보남성들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봐야한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국민윤리나 개인도덕 쯤으로 여기거나 성적지배를 남녀성비불균형의 폐해 정도로 이해하려는 (남성) 논객들의 고의적인 지식노동 해이와도 연결된다. 정치·경제·사회 영역을 아우르며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일이 업인 이들이 유독 여/성폭력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은 그들이 처한 ‘남성’이라는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 맑시스트 철학자 이종영(2004)의 연구는 그 연유를 추측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관념적으로 여성해방을 내세우다가도 여성해방이 실재로 실현되려고 할 때, 그들 자신의 (성적 지배의) 무의식과 만나는 남성주체에 대해 논한 바 있다. 남성이 유일한 주체인 세계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고자 할 때, 남성들은 지위상실에 대한 공포와 마주하며 자신의 성적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연대를 구축한다. 자신들이 구축한 성적 독점의 질서를 ‘자연적인 것’처럼 받아들여 온 남성은 ‘소유가 아닌 방식으로’ 여성을 만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아무리 성해방에 동의하는 볼세비키라 하더라도 성적지배 체제를 거부하는 ‘여성’과의 연대는, 주체가 되고자하는 여성에 대한 존중은, 성적 독점질서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과 직면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정리뉴스][페미니즘이 뭐길래]4회 ‘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에 부쳐

알다시피 이런 논의들은 오래됐고 식상하며 지겹고 권태롭다. 맑시즘과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권태기에 빠진 지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런 권태기를 거치면서 페미니즘과는 연대를 꿈 수 없게끔 ‘이상한’ 페미니즘 담론을 만드는 일에 힘써온 ‘진보남성’들의 활약은 ‘진보판’ 남성연대라 할만하다. 러시아 혁명 후 신설된 여성부를 ‘여편네센터’, ‘여편네위원회’라고 부르며 조롱하던 (남성) 볼세비키가 가졌던 두려움만큼이나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진보’의 만남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너희’에게 여/성폭력 문제를 ‘위탁한다’라는 구도를 고수하는 일이 진보와 페미니즘의 변증법이고 유기적인(‘역동적인’) 만남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도를 고수해온 데에는 ‘남성적’ 진보의 헤게모니를 결코 놓을 수 없는 그들의 (두려움이나 무지, 혹은) 의지를 반영한다. 이러한 위탁 구도는 첫째, 진보와 페미니즘을 통약불가능하게 분리시키며 둘째,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적’ 진보의 승인을 요한다는 점(“페미니즘! 너 잘할 수 있지? 믿고 맡길께!”)에서 상하 위계적인 젠더 질서에 부합할 뿐 아니라 셋째, ‘이상한’ 페미니즘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그 ‘이상한’ 페미니즘을 비난할 수 있는 권위를 ‘남성적’ 진보에 부여하는 세계를 구축해 간다.

만약 페미니즘을 향한 원망과 불신, 그리고 두려움의 시선을 내려놓고 ‘청년/진보/논객’의 데이트폭력 폭로와 대면했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았다. 두드릴 수 있는 문은 많았고 그 문을 열어 만나게 될 변화를 고대하는 세계도 빼곡했다. ‘청년진보논객’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온 진보/논객들이말로 6월의 소란스러움을 숙고하고 개입했어야 하는 주요한 주체였다. 이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서 ‘이상해진’ 페미니즘을 몰아내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청년/진보/논객’인 이들이 왜 이런 ‘연애’를 하는지, 이들에게 ‘자기에의 배려(epimeleia heautou)’는 어떻게 가능한지, 기괴한 입장문이나 가르침 말고 폭로 이후의 쟁점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고민했어야 한다. 먼 산 불구경 하듯 2세대 논객들의 데이트폭력 폭로 건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끌어온 ‘신규논객 양성과정’을 포함해서, 젠더를 초월하는 일이 그 영역에서는 어떻게 그리 쉬운가에 대해 심각하게 되짚어봐야 했다.

3. 공론장의 젠더화

착잡하다. ‘청년진보논객’의 데이트폭력 폭로 이후에 기대 이하의 응대를 고수하는 소위 진보논객들을 돌아보면서도 착잡하고, 데이트폭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편치 않다. 대체 이들이 말할 공간 하나 열어두지 못하고 그동안 어디서 무얼했는가 싶어 마음이 어수선하다. ‘청년진보논객’의 ‘데이트폭력’ 폭로를 둘러싼 말과 글들을 살피다보니 ‘남성들’의 세계와 그 사이에 끼어있는 ‘여성들’의 위치는 여전했고, 신문에서 말하는 ‘진보논객’이 누구인지 좇다보니 그곳에 ‘여성’이 부재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진보논객’을 진보논객이라 부를 수 있고 불릴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찾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불러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서로’가 될 수 없는 촛불소녀들이 진보논객이 아니라 진보논객의 ‘전 여친’이 되어 데이트폭력 폭로자로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 잘 짜여진 회로의 안정적인 아웃풋으로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닐 거다.

청년 논객 노정태씨가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아홉 명을 정리한 책.

청년 논객 노정태씨가 ‘인문·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아홉 명을 정리한 책.

페미니스트 폭력 연구자들이 재차 말해왔듯이 폭력은 ‘악(惡)’이 아니다. 폭력은 악이 아니라 ‘구조’다. 연애와 사랑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성역할 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의 흔적을 지우려 하겠지만, 비대칭적인 젠더구조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만나는 이성연애가 착취적이지 않으려면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의식적 노력 없는 ‘자연스러운’ 연애는 성별화된 연애의 수행이기 쉽다. 때문에 데이트폭력은 흔하디 흔하며 ‘청년/진보/논객’이라고 해서 예외이기 어렵다. 그들의 성장 경로도 예외 없이 젠더화되어 있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 중 한명을 지목해서 “그의 폭력이 교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고종석의 망언은 그래서 위험하고 틀렸다. 데이트폭력 담론에서 폭력을 예외적인 악(惡)으로 규정하고 가해자를 ‘가해자’로 굳히는 일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폭력을 구조로서 이해하고 구조 안에서 자신이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가해자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가해자의 변화가 곧 구조의 변화이고 균열일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가해자의 반성과 성찰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였을까. 과거처럼 조직 보위를 이유로 조직내 여/성폭력을 은폐하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징계 수위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의견이 갈렸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다른 여성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큰 뜻으로 폭로를 결심하지만 그런 ‘큰 뜻’은 사건해결과정에서 사라지기 일쑤였다. 피해자가 바라마지않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도 가해자 ‘처벌의 적정수위’를 정하는 일에 파묻혔고, 초단위로 일어나는 피해의 의심과 축소, 피해자 비난의 버라이어티한 서사는 애초의 사건을 전혀 다른 사건으로 둔갑시키곤 했다.

돌이켜보건데, 가해자에게 변화를 바라는 일은 늘 ‘무리’였다.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시간과 조건들이 필요했지만 그것을 언제까지 어떻게 (그리고 대체 왜) 기다려야 하는지는 피해자가 오롯이 져야 하는 몫으로 남았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해자를 향한 불신과 비난의 말들 덕분에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었고, 사건을 ‘적정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더 이상의 피해를 막는 최선의 방책이 되곤 했다. 이것이, 피해자중심주의와 가해자 성찰 독려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 둘은 상호의존적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빠른 사과’가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이 되어온, 꼬여버린 경로다. 누군가는 이런 꼬여버린 회로를 ‘이상해진’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이상해진-파쇼’ 페미니즘을 탓하며 가해자의 성찰을 방해한 이들의 심각한 무사유와 무책임은 드러난 적이 없다. 오랫동안 가해자들은 젠더 위계가 작동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을 기각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 짓는 자기정당화의 서사(김보화, 2011)를 구사해왔다. 가해자에게 성찰의 기회를 빼앗고 자기정당화의 서사를 완성시킨 것은 바로 ‘이상해진’ 페미니즘 운운하는 주변인들의 동조다. 이들은 가해자의 성찰을 원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성찰은 젠더 구조의 균열과 맞닿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편협한’ 페미니즘에 굴복하는 일이고 ‘사소한’ 일에 인생을 거는 일이자 심지어 ‘남자답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분명한 건 지금 우리는 ‘여친과 나는 권력관계에 있지 않았다’라는 데이트폭력 가해자의 말 한마디가 일군의 무리를 침묵하게 하고 전 여친의 데이트폭력 폭로 전체를 의심하게 하는 사회에 산다는 사실이다. 피해자들이 그토록 받고 싶어했던 ‘신뢰’는 가해자들에게로 향한다. 얼핏 피해자의 폭로는 피해자가 가진 강력한 무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무기는 ‘나 그런 적 없는데’라는 한마디에 주저앉혀지는 무늬만 무기인 ‘무기’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페미니즘이 갖지 못한 담론헤게모니가 무엇인지를 실감한다. 성, 사랑, 연애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다고 말해온 페미니즘의 주된 주장은 여전히 수용될 기미가 없고, ‘사인 간의 연애문제를 ‘제3자’가 판단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건에서 사람들이 가장 집중하는 이슈이자 가장 넘기 힘든 인식의 벽이다. 피해사실을 존중하는 일은 사적인 ‘연애’와 ‘사랑’을 공적 논의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제대로 고민된 적이 없었다. 가해자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대중과 피해를 기각시키는 일이 더 쉬운 대중의 지배적인 정서(affect)는 반(反)페미니즘 정서와 함께 나날이 상승 중이다. ‘남성’ 진보 논객은 데이트폭력 폭로에 대한 언급 자제와 사유 중단이라는 지적 실천을 통해서 이런 정서의 수용과 확산을 독려한다. 이렇게 편안하게 그들은 성적 지배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공론장을 젠더화 한다.

‘젠더화(gendered)’는 어떤 대상이 젠더(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역할 규범, 구분의 범주)에 의해 뚜렷이 구분되고, 그 사이에 위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의미가 있다.

‘젠더화(gendered)’는 어떤 대상이 젠더(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역할 규범, 구분의 범주)에 의해 뚜렷이 구분되고, 그 사이에 위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의미가 있다.

4. 연대는 가능한가

다시, 이 글을 쓰게 한 논객 김민하의 글로 돌아가 보자. 그의 글에 달린 댓글처럼 이 글은 ‘어디에도 없는 진짜 위로’가 되는 글이다. 아래는 그의 글 중의 일부다.

그간 친한 친구를 자처하면서도 이런 사실들에 무감하였던 자신을 반성하며 피해 여성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의사를 밝힌다. 아울러 무슨 이유에서든 OOO의 행위를 옹호하는 부적절한 행위들에 대해… 제발 부탁드린다. 피해 여성에 대한 2차 가해는 OOO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OOO을 편들어주는 것은 그가 여성을 폭행하는 사람으로 영원히 남기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진보니 글쟁이니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는 변해야 하고 교정되어야 한다. (그를) 버리지도 않고 단절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 나름의 명성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그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다. 나는 그게 이런 사건에서 가해자의 친구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OOO의 글과 재능을 아끼는 다른 분들도 피해 여성을 비난하거나 그의 폭력을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데 함께해주시길 바란다.
- 김민하(이상한모자), 2015. 6. 21.


그의 글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부다. 피해자가 원했던 모든 것이고 그동안 페미니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의 전부다. (남성) 논객이 서있어 주길 바랬던 자리이고 가해자의 지인이 해주었으면 하는 역할이다. ‘파탄적 연애’로 괴로워했던 친구를 데이트폭력 가해자로 호명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한다. 파탄적 연애와 데이트 폭력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호명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숙고를 중도에 멈췄다면 ‘파탄적 연애’는 ‘데이트폭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가해자의 지인이자, 책임있는 사유를 해야할 논객이고, 젠더질서의 우위에 있는 남성 젠더인 그가 자신의 교차적 위치를 아프게 돌아보며 생산된 글이다.

그만큼 나는 이 글이 다른 논객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생산중인 젠더화된 공론장을 뒤돌아볼 수 있게 하는 좌표로 읽히기를 기대한다. 침묵의 연대를 무/의식적으로 강화해온 남성논객들이 자신의 실천을 ‘의식’해 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파쇼/이상한’ 페미니즘이라는 부정적 재현을 멈추고 구조로서의 여/성폭력과 대면할 수 있는 정서를 살려내는 일에 페미니즘과 연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연대요청은 절실하다. 구별짓기된 페미니스트들의 힘만으로는 가해자의 성찰과 피해의 회복을 동시에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세계를 구현할 수 없다. 이때의 연대는 페미니스트임을 ‘공약’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라는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거나, 이런 선언에 아무런 질문없이 이름을 연명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질문없는 연명은 오히려 연대가 아니라 침묵의 방향에 선다.

이 글을 통해 남성논객들에게 바라는 절실한 연대는 ‘공약’이 아니라 같은 방향에 서보려는 노력이다. 정연한 젠더 질서를 옹호할리 없는 스스로의 위치를 되묻고(진정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가), 그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젠더 질서를 흔드는 일과의 직면은 왜 어려운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는 일이다. 절실하게 요청하는 연대란 이런 질문하기의 시간을 통해서 또다른 자신의 위치를 발견해보고 ‘공약’ 따위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페미니즘과 같은 방향에 서보는 연습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젠더로 구획된 세계를 보지 않기로 한 결정을 멈추는 일이고, ‘남자’로 호명받기 위해서 여성을 (보호하거나) 착취해야했던 취약한 남성성을 ‘과거’로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분명 페미니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라 믿는다.

* 이 글은 [여/성이론] 에 실릴 예정인 원고를 축약하였음을 밝힙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 | 경향신문 자료사진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 |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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