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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데니스네 집으로 가는 길

  • 장은교 기자

저녁마다 대화하는 가족 “세대 차이? 의견 차이가 있을 뿐”

사람답게 대해 주는 ‘착한 감옥’…손에 든 ‘흉기’가 예술도구로

데니스(51)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 중심가의 산페드로 마을. 상점에서 빵과 먹을거리를 사서 집으로 출발할 때에는 걸어가도 30분 거리라고 들었는데,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태워주고 들러야 할 곳이 생겼다. 데니스는 시내에서 둘째 딸 알리슨(21)의 친구들을 만났고 목적지까지 태워줬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이 산호세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을 때에는 옆 차로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정체된 틈을 타 한 소년이 도로 사이에서 줄과 공으로 묘기를 선보였다. 실패를 했지만 박수를 받았다. 소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갈 때까지 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앞에 다 왔는데 데니스는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더니 10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막내아들 데니스(12)가 놀러간 친구집이라고 했다. 데니스는 아들과 함께 나오더니 문 앞에서 아들의 친구, 그 친구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눴다.

코스타리카 산호세에 사는 데니스(오른쪽에서 두번째)네 식구들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은 ‘대화’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12월6일 데니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까지 한 식구처럼 드나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호세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코스타리카 산호세에 사는 데니스(오른쪽에서 두번째)네 식구들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은 ‘대화’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12월6일 데니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까지 한 식구처럼 드나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호세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2015년 12월6일, 골목과 이웃 그리고 가족이 있는 데니스 아저씨의 집에 놀러갔다. 하얀 담벼락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늘빛으로 칠한 집과 작은 마당이 보였다. 전자제품 수리기사인 데니스네 집은 중산층에 속한다. 이 나라에서도 빈부격차는 있으나 중산층이 두꺼운 편이다. 아내와 열심히 돈을 모아 10년 전 장만한 집이라고 했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이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돈을 벌었다고 평수를 늘리지도 않는다. 대신 누구든 집을 자기 마음대로 고쳐서 산다. 이곳에서는 똑같이 생긴 집을 보기 힘들다. 낮은 담장의 집들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져 있고, 작은 아파트도 층마다, 집마다 벽 색깔과 창문 장식이 달랐다.

[행복기행] (2) 데니스네 집으로 가는 길

■집은 곧 ‘가족’이다

데니스의 집 입구에는 에펠탑과 모나리자 퍼즐이 전시돼 있었다. 퍼즐을 좋아하는 아내 파트리시아의 솜씨였다. 옆에는 가족끼리 여행을 갈 때마다 모아온 조개와 돌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아이들이 음료수 캔으로 만든 장식품도 보였다. ‘데니스의 집’은 곧 ‘데니스의 가족’이었다. 가족의 이야기가 집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세 딸과 막내아들은 각자 좋아하는 빛깔로 벽을 칠했다. 작은딸의 방에는 할머니가 쓰던 화장대가 있다. 부부는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딸들을 위해 뒷마당에 매트를 깔아 미니 공연장을 만들었다.

파트리시아는 “매일 저녁 6~7시에는 가족이 다같이 모여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중요한 날에는 반드시 함께 저녁을 먹는다. 25살 큰딸 샬린과 알리슨, 셋째 딸인 18살 메간에게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해 아쉽겠다”고 찔러봤다. 다들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되지요.” “특별한 날은 당연히 가족과 보내는 것 아닌가요.” 한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온전히 가족과 함께한 시간, 부모님과 함께한 ‘기념할 만한 날들’이 얼마나 되던가. 그 시간들이야말로 행복이 아니었던가.

산호세는 집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다. 거리에서 마주친 한 집의 벽 장식이 이색적이다. 산호세 | 김정근 기자

산호세는 집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다. 거리에서 마주친 한 집의 벽 장식이 이색적이다. 산호세 | 김정근 기자

샬린과 알리슨의 친구들이 집으로 들어오더니 자연스레 소파에 앉아 한 식구처럼 어울려 놀았다. 아빠 데니스는 “친구들 모두 동네에 살고, 아이들 친구들과 그 부모들도 모두 이웃”이라면서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드나들며 지내는 한 가족”이라고 했다.

행복해 보여도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갈등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세대 차이는 없는지 물었다. “세대갈등? 우리 집에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에요. 세대 차이가 아니라 의견 차이 아닐까요.” 샬린은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나쁜 일에 대해선 왜 나쁜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줬고, 이해를 하면서 성숙하게 됐다. 대화를 하면서 중심을 잡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 해결된다”고 말했다. 데니스가 거들었다. “우리에게도 힘들지 않은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늘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이 우리가 행복한 비결이에요. 하느님이 언제 행복을 빼앗아 갈지 모르거든요. 우린 매순간 감사해요.”

■동물들조차 스트레스를 덜 받는 나라

코스타리카의 부모들은 아이가 15살이 되면 진로를 결정하게 한다. 법적인 성인은 18세부터지만 15살이 넘으면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로 인정해주고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직업을 가질 것인지를 묻는다. 일을 시작하면 부모에게 적은 금액이라도 월세를 낸다. 사회인으로 인정받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도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지면, 그때 하면 된다. 학비가 완전히 무료인 국립대학 두 곳을 빼면 대학입시 경쟁은 그리 치열하지 않다. 사립대학 학비도 1년에 100만원 정도다. 국방비를 없애고 교육에 투자한 덕분이다. 코스타리카는 국내총생산(GDP)의 7% 가까이를 교육비로 쓴다. 대학입학시험 점수를 받아놓으면 10년간 유효하다. 대학에 들어갔다가 중간에 나와 다른 일을 하더라도, 미리 받아놓은 점수로 대학에 다시 갈 수 있다. 그 대신 학사관리는 엄격하다. 초등학생도 연말 시험에서 70점을 넘지 못하면 유급한다. 유급을 했다 해도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에 있는 페리아 재래시장에서 지난해 12월6일 상인이 과일들을 늘어놓은 채 팔고 있다.  산호세 | 김정근 기자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에 있는 페리아 재래시장에서 지난해 12월6일 상인이 과일들을 늘어놓은 채 팔고 있다. 산호세 | 김정근 기자

저축은 거의 없다. 오늘 번 돈으로 오늘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과 여행하고 집을 꾸미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11월이면 크리스마스 장식품 가게에는 물건이 동난다. 그렇다고 낭비나 사치를 한다 말하기도 어렵다. 물건을 쉽게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고쳐 쓴다. 한 번 자동차를 사면 20년씩 타기 때문에 중고차 부품 가게가 거리마다 눈에 띄었다. 한국의 1990년대 차종도 많이 보였다.

느리게,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몸에 밴 듯했다. 교민 김정혜씨(24)는 “만원 버스에 할머니가 타면 운전기사가 일어나 큰 소리로 ‘할머니가 타십니다’라고 외치고, 그러면 승객들은 자리를 비켜준다”고 했다. 가난한 것, 장애가 있는 것은 배려받아야 할 일이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지만 약자를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구급차가 지나갔고 양방향 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김씨는 “여기서는 동물들조차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코스타리카는 잘 보존된 자연과 에코투어(환경·생태관광)로 유명하다. 미국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자연공원도 코스타리카 해안에 있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2013년 코스타리카 정부는 100년 가까이 된 동물원의 동물들을 모두 자연으로 되돌려보냈다. 국토의 25%가 자연보호구역이다.

이 나라가 청정에너지 정책을 수립한 것은, 군대를 없앤 호세 피게레스의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1949년이었다. 1990년대부터는 환경을 희생시키면서 GDP를 늘리는 대신 환경 파괴가 불러올 사회적 비용까지 계산해 평가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1995년에는 환경행정법원(TAA)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이 법원의 단속관들은 어떤 수사기구보다도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환경 파괴 범죄를 단속한다. “코스타리카에서는 환경부의 힘이 가장 세다”고 한다. 에너지·광업·수자원 등과 관련된 행정을 환경부가 총괄하기 때문이다.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 동쪽 카르타고에 있는 코코리 교도소는 ‘담장 없는 교도소’로 유명하다. 지난해 12월6일, 이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특기를 살려 공예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있다.    카르타고 | 김정근 기자jeongk@kyunghyang.com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 동쪽 카르타고에 있는 코코리 교도소는 ‘담장 없는 교도소’로 유명하다. 지난해 12월6일, 이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특기를 살려 공예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있다. 카르타고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담장 없는 교도소

며칠 스쳐지나가는 여행자 처지에서, 환경·인권·평화 같은 가치들이 얼마나 중시되는지를 한눈에 파악하기는 힘들다. 산호세 남동쪽 카르타고에는 코스타리카에서도 특히 유명한 교도소가 있다. 초등학교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는 코코리 교도소다. 전국에서 단 한 곳,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인권 교도소’라 해서 그곳을 찾아갔다. 산호세에서 만난 이들 모두가 평화와 인권과 행복을 말했지만,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이라고 할 만한 교도소에서도 그런 가치가 지켜지는지 궁금했다.

교도소는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곁에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교도소의 모습이었다. 코코리 교도소는 콘크리트 담장 대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파란 지붕, 빨간 지붕의 교도소 건물들이 보였다.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 걸어다니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입고 있는 옷조차 모두 달라서 교도관인지, 재소자인지 알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 24년 동안 목회활동을 해왔다는 마르빈 목사(59)를 만났다. 재소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며 사회에 다시 나갈 기회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정부는 2000년 교도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보기 위해 이곳을 지었다. 높은 담장이 없어도 15년 동안 탈옥을 하려 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고, 실패했다고 한다. 담장은 없어도 보안검색은 철저했다. 2개의 문과 검색대를 통과하니 꽃밭이 일궈진 정원이 보였다. 모두 재소자들이 씨를 뿌려 가꾼 것이다. 공들인 유리공예로 아기 그리스도와 성모상 장식물을 만들어놓은 것도 보였다. 역시 교도소에서 배운 솜씨로 재소자들이 만든 작품들이었다.

코코리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지난해 12월에 만든 성탄 장식품과 공예품들이다. 투박한 손으로 성모상을 그리고 동물 조각을 만들던 재소자들은 “우리를 사람답게 대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카르타고 | 김정근 기자

코코리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지난해 12월에 만든 성탄 장식품과 공예품들이다. 투박한 손으로 성모상을 그리고 동물 조각을 만들던 재소자들은 “우리를 사람답게 대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카르타고 | 김정근 기자

수감시설 옆에 방갈로 같은 건물이 보였다. 재소자들이 연인이나 부인과 ‘합방’하는 곳이다. 모든 재소자들은 보름마다 한 번씩 4시간 동안 그곳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다. 방 안에는 침대와 TV가 있고 전자레인지와 화장실도 있다. 주로 부인들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와 함께 먹는다고 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동성애자인 재소자도 연인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뿐 아니라 다른 모든 교도소에서도 연인과의 합방은 가능하다고 교도관은 설명했다. 죄를 지었더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는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죄수복조차 따로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편을 면회 온 아나(26)를 만났다. 음식 바구니를 챙겨온 아나는 “다른 교도소에 있을 때보다 남편이 훨씬 안정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나는 아이 셋을 낳고 살다가 재작년 교도소 안에서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다. 가족 면회는 일주일에 한 번이고,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는 아이들을 초청해 작은 파티를 열어준다. 이때 재소자들은 교도소에서 배운 기술로 만든 공예품들을 전시하며 가족들은 이 물품들을 판 돈을 생활비에 보태 쓴다.

체육관에서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축구팀에서 뛰고 있는 네이마르의 유니폼을 입은 남성은 교도소장 리카르도(56)였고 나머지는 모두 재소자들이었다. 18살 때부터 교정공무원으로 일해온 그는 코코리 교도소가 열린 이후 계속 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중범죄자를 엄하게 다스리는 교도소에서도 일해 봤지만 이곳의 재범률이 낮다”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재소자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다시 사회에 나갈 터인데,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리카르도는 “담장을 없앤 것은 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바로 저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죄를 지은 이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좋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는 “그런 시선까지도 바뀔 수 있게 하는 것이 교도소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공예 교실에서 만난 자미에라는 재소자는 투박한 손으로 나무인형에 색칠을 하다 수줍게 웃었다. 교도소에서 아기사슴 밤비와 키티와 성모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줄은 몰랐다. 한 재소자는 “조금 답답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이 느껴져서 고맙다”고 말했다. 한참을 둘러본 뒤에야 재소자들 손에 칼과 톱과 망치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때 흉기를 들었던 이들은 어느새 예술 도구가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교도소에는 경범죄를 저지를 사람이나 초범자만 오는 게 아니라, 징역 12~20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수감된다. 중범죄자들은 사방이 막힌 수감동에 갇힌다. 반면 형기가 2년 이하로 남았거나 일정 기간 형기를 성실하게 채운 이들은 개방형 숙소로 옮겨진다.

[행복기행] (2) 데니스네 집으로 가는 길

■“행복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

교도소를 나와 근처 식당으로 갔다. 밥을 먹고 있던 테네(46)라는 여성은 교도소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마을에서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처음에는 반대도 심했죠. 그런데 한 친척이, 교도소 옆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제일 안전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교도소가 들어오는 것에 찬성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이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잖아요. 기회를 줘야죠.”

어떤 제도, 어떤 조건도 그 자체만으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교도소든, 선거제도이든, 복지 시스템이든 다 마찬가지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제도도 없고, 완벽한 나라도 없다. 산호세에서 만난 ‘까칠한 대학생’ 마우리시오(21)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정부가 다른 문제들을 다 덮으려 하는 것 같다”며 “군대를 없앤 대신 교육에 돈을 쓰기로 했지만 지금 현실을 봐라. 축구 선수가 교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 교사는 후대를 양성하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 북쪽 바라블랑카에 있는 라파스워터폴가든스 공원에서 관광객이 팔에 앵무새를 앉혀 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 코스타리카는 국토의 4분의 1이 자연보호구역이다.   바라블랑카 | 김정근 기자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 북쪽 바라블랑카에 있는 라파스워터폴가든스 공원에서 관광객이 팔에 앵무새를 앉혀 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 코스타리카는 국토의 4분의 1이 자연보호구역이다. 바라블랑카 | 김정근 기자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정부가 임산부에게 각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는데, 임신과 출산에 직접 들어가는 비용은 나라에서 책임지지만 출산·육아휴가는 4개월뿐이다. 이곳의 워킹맘들도 가족과 이웃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키운다. 그래도 코스타리카에서 만난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다섯 살, 두 살 아이들을 키우는 마리아나(26)는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내 아이가 자라서 살 이 나라가 앞으로도 평화로울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늘 행복할 이유가 많았다. 이들에게 삶은 ‘선물’이었다. 날마다 그날의 선물 상자를 풀어보는 이들 같았다. 산길을 오르다가 갑자기 날이 궂어져 우산을 꺼낼지 망설이고 있는 내게, 옆에 서 있던 소녀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자연을 짧은 시간에 다 느낄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예정에 없던 마라톤 때문에 길이 막혀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겼지만 불평하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라톤은 건강에 좋은 거니까. 좋은 일은 축복해줘야지”라는 것이 이유였다. 남미 특유의 낙천성 때문일까, 아니면 종교 덕분일까. 설마 이 모든 것이 67년 전 한 지도자가 군대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두 아들을 키우는 실비아(47)는 먼 곳에서 행복을 찾아온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친구, 행복은 스스로 결정하는 거예요. 영혼 깊은 곳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행복하고 싶다고 결정하는 거죠. 오늘부터 연습해봐요.” 코스타리카에서 나는 행복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만났다.

특별취재팀

구정은 김세훈 장은교 김보미 박은하 정희완 김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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