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도공들 발자취 남은 이곳… 일본 아리타
인구 2만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매년 4월29일부터 열리는 축제 기간엔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이 없는 마을. 일본 도자기의 중심지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다. 올해는 아리타 자기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다. 나지막한 건물과 조용한 거리의 시골 마을엔 아리타 자기의 역사는 곧 일본 자기의 역사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매 정시와 30분에 음악이 흘러나오는 규슈도자문화관의 오르골시계.
아리타 자기는 조선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의 왜란으로 수많은 조선인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왔다. 이들 중 한 무리를 이끈 이삼평(李參平)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석(磁石)장을 발견했다. 이곳을 기반으로 자기 제작의 분업·체계화를 통한 대량생산을 주도하며 산밖에 없던 마을에 아리타야키(有田燒)를 일으키고 발전시켰다. 이는 토기 수준이었던 일본 요업계의 대변화였으며 본격적인 도자기 산업의 시작이었다. 당시 사가 번주(藩主)는 그 공적을 인정, 이삼평에게 이름(가나가에 산베에·金ケ江三兵衛)을 주고 무사계급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삼평을 ‘도자기의 아버지(도조·陶祖)’라 부른다.

‘도자기의 아버지’ 이삼평 묘비.
아리타관광협회(www.arita.jp)의 협조를 받아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아리타 중심거리에 있는 ‘14대 가나가에 산베에’의 갤러리. 지난해 부산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 그는 이삼평의 14대손이다. 현재 아리타 자기는 제작에 용이한 구마모토(熊本)현 아마쿠사(天草) 자석을 주로 쓰는데 14대손은 작품 완성도가 장인의 기술에 좌우되는 이즈미야마 자석을 이용한다.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다. 그는 “올해가 아리타 자기 400년인 만큼 그 원형을 추구하고 싶다”면서 “아리타 자기의 특징은 색을 많이 쓰지 않아 단순·소박하면서도 고급스럽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전통과도 통한다”고 했다.

260년 역사를 가진 겐에몬(源右衛門) 전통가마.
14대손의 안내로 갤러리 뒤편에 있는 도잔(陶山)신사로 향했다. 이삼평 사후 1658년 세워진 이곳은 15대 천황을 주제신(主祭神)으로, 사가 번주와 이삼평을 함께 모시는 신사다. 도조의 신사답게 도리이(鳥居) 등 조형물이 자기로 돼 있다. 아리타 도공들이 봉헌한 것이다. 신사 왼쪽 길로 올라가면 ‘도조이삼평비’가 있다. 이곳에 오르자 아리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비는 1917년 세워졌다. 조선인의 비를 천황 신사보다 더 높은 곳에 지었다는 점에 놀랐다. 건립 시기가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라는 점에 비춰보면 이삼평에 대한 아리타 사람들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삼평비에서 내려다본 아리타 전경
이삼평이 확립한 분업 체계로 자기를 제작하는 겐에몬(源右衛門)가마를 둘러봤다. 100여곳의 가마가 있는 아리타에서 260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분주하게 작업 중인 10여명의 도공들을 보며 전통가마의 모습이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보던 낮은 가마와 달리 높이가 좀 됐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굽은 정도로 온도를 가늠하는 일종의 온도센서인 제게르콘이 놓여 있었다. 내부 벽면은 초콜릿을 발라놓은 듯했다. 장작의 재와 가마 벽돌의 유리 성분 등이 만나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삼평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아리타 자기 창업에 공헌한 또 한 명의 도공이 있다.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의 모티브가 된 여성 도공 백파선(百婆仙)이다.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아리타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도공들의 지도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지난 2월 그의 이름을 딴 ‘백파선갤러리’가 개관했다. 폐가를 리모델링해 고(古)민가의 느낌을 살린, 작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여성 작가들의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지원하는 ‘백파(100명의 할머니) 육성 프로젝트’ 등 백파선의 정신을 기려 여성 작가 중심으로 운영될 계획이다. 이달 말 도자기축제 기간에는 한·일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한국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고 한다. 작가 겸 갤러리 큐레이터 노진주씨는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한·일 문화 교류의 거점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14대손 가나가에 산베에 갤러리에 모셔놓은 ‘도자기의 아버지’ 이삼평상.
아리타 자기를 한눈에 살펴보려면 자기 탄생 350년을 기념해 건립된 규슈도자문화관이 좋다. 자기의 역사는 기본이고, 내부를 자기로 꾸민 화장실을 비롯해 각종 컬렉션을 볼 수 있다. 이곳엔 자동인형 오르골시계가 있는데 매 정시와 30분, 자기로 만들어진 육중한 몸체에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아리타 우치야마의 거리(內山の町)는 지은 지 100년 이상 된 건물들이 있는, 국가지정 중요전통건축물보존지구이다. 상점과 갤러리가 늘어선 거리 뒤편에선 오름가마를 쌓는 데 사용된 내화벽돌(톤바이·トンバイ)과 도기 파편 등을 적토로 발라 만든 ‘톤바이 담’을 볼 수 있다. 이 토담길을 유유자적하게 걷다 보면 시골 골목의 정취가 다가온다.
‘갤러리 아리타’에선 ‘아리타야키 고젠(五膳)’을 맛볼 수 있다. 구이, 초절임, 조림, 찜, 튀김 등 5가지 요리를 아리타 자기에 정갈하게 담아낸다. 식사 후 진열된 자기 잔에서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데 각양각색 수백개의 잔에서 하나를 고르자니 말 그대로 ‘결정장애’가 생긴다.
아리타역 에키벤(驛弁·역에서 파는 도시락)을 빼놓을 순 없다. 에키벤으로 유명한 일본이지만 이곳 메뉴는 ‘아리타야키 카레’다. 아리타 자기에 담긴 카레를 다 먹고 나면 그릇을 기념으로 가져올 수 있다. 그릇이 크고 가벼워 제법 실용적이다. ‘하마 쿠키’는 간식거리로 좋다. 가마에 구울 때 자기 아래에 놓는 받침인 ‘하마(はま)’를 본떠 만든 쿠키로 담백하다.
아리타 여행은 축제 기간이 아니어도 괜찮다. 소박함과 고즈넉함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 아리타 마을의 하루는 오후 5시, 마감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면 찬찬히 쉼에 들어간다. 이에 맞춰 발걸음도, 자전거 페달도 쉬어주면 된다. 400년간 이어져온 조선 도공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힐링할 수 있는 것은 도자기 마을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아리타 관광 문의 (주)ICC (02)737-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