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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마저 가난해진 줄 알았다

입력 2016.04.17 20:59

수정 2016.04.17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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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이 우리 사회에 준 가장 큰 은총은 ‘믿음의 회복’일 것이다. 수년간 몇 차례 선거를 거치면서 잃어가던 ‘민심의 현명함’에 대한 믿음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투표 당일 ‘총알’이 될 투표용지를 앞에 두고 의심했을 것이다. ‘나의 이 한 표가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저 콘트리트처럼 단단한 절대(?) 정부의 절대 오만이 깨어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허공을 향해 난사하는 공포탄 같은 쓰라린 마음으로 기표 도장을 꾹 눌렀을 터다.

[아침을 열며]희망마저 가난해진 줄 알았다

“10년 전 같이 일을 시작했다가 이젠 반도 안 남았다. 다 이혼했다. 집에 가져가는 돈이 자꾸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난한 사람들이 반 이상 박근혜를 찍는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공포 때문에 굽신거리는 거다. 너무 억울하다. 민주세력이 하나가 돼도 부족할 판인데 나뉘어 싸우니 희망도 꺼져간다. 그래서 희망도 가난해졌다.”

한 지인이 총선 직전 페이스북에 올린 어느 택시기사의 이야기다. 그것은 꽤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러온 ‘주술’과도 같은 편견이었다. 노년층은 박근혜 대통령의 ‘팬덤’이 돼 또 묻지마 지지를 하겠지란 답답함이고, 젊은 세대와 가난한 서민들은 방관하거나 계급배반 투표를 하고 있다는 원망이었다. ‘보수 아니면 진보’ ‘여 아니면 야’라는 딱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반복된 정치적 기억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편견은 좌절이 차곡차곡 쌓인 고립감의 다른 얼굴이었다.

하지만 총선 날 밤 TV화면을 통해 본 결과는 그런 상처 입은 마음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길을 만들고, 산과 강이 되며, 그리고 도도한 바다로 흘러 세상을 덮어가는지를 절감케 했다. 희망이 가난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희망은 그렇게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인 것처럼 절대 가난해지지 않았더라.

수년간 빈말과 약속 파기로 세상을 황폐하게 하고도, 선거라고 다시 ‘미래’라는 신기루를 꺼내던 정치 언어는 저격당했다. 택시기사의 독백처럼 삶은 난장판인데 경제팀은 ‘괜찮다’고만 했다. 대통령은 “국민”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언어는 여의도 눈엣가시들을 제거하는 데서만 진정성이 보였다. 국민들 고통을 알고 위로하는 게 아니라 지시하고, 야단치고, ‘심판해달라’고 보챘다.

총선 표심은 대통령이 비명처럼 내지른 ‘배반의 통증’이 실상 지난 몇 년간 뭇사람이 차곡차곡 쌓아온 배신감과 상실감에 대한 부끄러움이어야 했음을 웅변한다. 실상 배반은 권력이 아주 조그마한 얼룩만 보여도 싹을 틔우는 ‘권력의 예보계’와도 같다. 대통령의 ‘배반의 아우성’은 그 점에서 오히려 모호하던 배반의 행렬을 불러들인 꼴이다.

하지만 저격당한 것이 대통령만은 아니다. 정치도, 언론도, 유권자들도 모두 저격당했다. 이분법적 정치만을 현실로 알던 ‘흑백 동굴’ 속 우상들은 스스로를 저격했다. 그들의 익숙한 현실을 편견으로 만들었다. 가난해지던 희망은 절로 부유해진 게 아니라 신천지를 찾고서야 부유해질 수 있었다.

새누리당 지지자이면서 야권에도 표를 준 그들, 박근혜 정부에 ‘투표 포기’로 의지를 표시한 그들은 우리 사회 프리즘에서 ‘성찰적 표심’ 정도로 위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성찰적 유권자’는 오만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희구를 상징한다.

권력은 움직이고 있다. 대선을 20개월 앞둔 이 시점의 변화를 일반적 총선 표심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희망을 접은 권력은 밀쳐두고, 누가 희망을 품을 만한 권력인지를 따져보는 장정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야당들은 좋아할 게 아니라 잔뜩 긴장해야 할 상황이다. 기회와 함께 온 미증유의 위기에 안달복달해도 모자란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권력에 대한 의지’다. 권력을 쥐기 위한 다툼이 권력 의지일 수는 없다.

국민의당은 묻고 또 되물어야 한다. 불길처럼 타오른 제3당에 대한 성찰적 표심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그만큼의 내부 구성과 내용물은 갖춰져 있는가. 면면만 보면 머리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는 안철수 대표의 평가가 박 대통령의 “국민”처럼 ‘영혼 없는 빈말’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쉽게 지울 수 없는 이유다.

더불어민주당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총선 제1당’이란 성가에도 불구하고, 사죄하고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옹색함이 현실을 증명한다. 힘과 논리의 우위로 여당과 야심만만한 3당을 끌고 갈 실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 더 이상 기댈 언덕(호남)도 없다.

더민주도, 국민의당도 이런 과제 풀이에 실패한다면 다음 민심의 총알은 그들을 향할 것이다. 살아나려던 희망이 다시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희망이 가난해질까 더 이상 안절부절못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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