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이진경 “심청의 죽음은 ’효’인가?” “심청은 마조히스트?”

인터파크도서 북DB 이진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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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진경이라는 이름에는 늘 <철학과 굴뚝 청소부>라는 책이 따라다녔었다. 그 책은 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겐 철학에 관한 필독서, 아니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90년대 이후에도 그는 줄곧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출발해 푸코,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다루고 영화, 문학, 철학의 영역을 아우르는 저술활동과 강의를 펼쳐왔다. 현재도 여러 개의 대학 강의를 비롯해, 인문학 연구공동체 ’수유너머N’에서의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그가 우리나라 고전을 다룬 정말 의외의 책으로 우리 곁을 다시 찾아왔다. <파격의 고전>이란 제목에서 엿보이듯이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심청전> ,<홍길동전>부터 시작해 <금오신화>와 <최고운전>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들을 ’고전’으로 만들었던 그 틀을 깨고자 한다. 심청은 과연 효녀였는가? 홍길동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었는가? 너무나 뻔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에 던지는 이 질문들은 그 이야기들이 전혀 뻔 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길잡이가 된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파격적인 시도가 ’고전’이라는 틀을 직조했던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고 그걸 통해 이 고전들이 뜻밖의 작품으로 우리 현재의 삶 속에 들어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우리 고전 안에 있는 윤리, 가족, 제도, 생명, 저항의 요소들을 새롭게 직조해보자고 제안하는 그를 연희동 수유너머N에서 만났다.

Q. 책 제목이 <파격의 고전>입니다. 말 그대로 고전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들을 제안하셨어요. 이제까지 선생님은 서구 철학, 그것도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주로 연구하시고 강의해오셨는데요, 특별히 우리나라 고전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나 이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사실 제가 예전에 ’시간’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에 관한 글도 쓴 적이 있어요. 한때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조선 시대 세시풍속에서 조선 시대 사람들의 시간감각, 시간의식과 같은 것을 연구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조선 시대의 풍속이나 제의 같은 것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이 시대 사람들이 시간감각뿐 아니라 존재자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는 많이 달랐구나 하는 점을 느꼈어요. 예전에는 성주신처럼 집안, 토지, 나무 등 곳곳에 신들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미신으로 간주되고 허황된 관념으로 여기지만 그들에겐 어디에나 신들이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조선 시대 사람들뿐 아니라 근대 이전에는 신이 어디에나 존재했어요.

존재에 관한 생각 말고도 많은 부분에서 지금의 우리와는 사고방식이 다른데, 그렇다면 당시의 관점에서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부해서 <삼국유사>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여기서 ’유사(遺事)’가 역사 사(史)가 아니고, 일 사(事), 즉 남겨진 것들이란 말이거든요. 정사가 아닌 것들, 남겨진 것들, 신화를 또 다른 역사로 기록한다는 것, 이것도 대단히 독특한 역사 관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문제의식에서 보니 심청전을 비롯한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국 고전소설들도 독특한 그 시대의 관념을 보여줄 텐데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보아온 게 아닐까?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당시에는 바로 덤벼들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읽다 보니 작품들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색깔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작품들이 오히려 우리의 통념 안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작업을 해보게 된 거지요.

Q 작품을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 ‘대전(帶電)’이라는 독해방식을 제시하셨어요. 개념을 문질러서 전기를 띠게 하고, 관련 있는 말이나 문장을 달라붙게 한다는 의미인데 언뜻 와 닿지는 않았어요. 조금 쉽게 설명해주시겠어요?

제가 물리적인 방식의 은유를 써보았는데, 텍스트 안에 여러 가지 방식의 주제나 요소들이 섞여 있는데, 거기에는 서로 친연성을 가진 것도 있고, 서로 반발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섞여 있어서 잘 보이지 않고 더구나 우리의 통념이 강하면 더욱 이런 것들이 잘 안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통념들을 제거하고 텍스트들에 다시 접근해보면, 그 안에 있는 요소들 가운데 친연성이 있는 것들을 연결해주고, 반발하는 것들을 찾아주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분리해볼 수 있지요.

책에도 이야기했지만, 가령 <홍길동전>과 <전우치전>에는 도술이라는 요소가 그런 경우인데요. 두 소설이 모두 도술을 사용하는 소설로 이해하죠. 그 외에도 <박씨부인전>에도 도술이 나오고요. 홍길동전의 내용을 보면, 홍길동이 주역을 읽고 있다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나고, 불길하니까 점을 치는데, 이렇게 점이나 주역과 같은 인간이 개발한 지식에서 도술을 얻는다는 점에서 홍길동전의 도술은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반면, 전우치의 도술은 주역이니 이런 것이 아니거든요. 전우치는 여우의 호정(넋)을 뺏어 먹으면서 생긴 능력으로 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더 높은 도술에 도달하기 위해 여우가 가지고 있는 비서를 공부해야 하지요. 여기서도 전우치 자신은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여우의 도움을 받게 되거든요. 이런 점에서 도술이 동물적인 기원을 갖고 있지요.

또 다른 한편에서 전우치는 권력자들을 골탕먹이고 장난치는 데 도술을 이용하거든요. 그러나 홍길동의 도술은 전혀 그런 유희적인 성격이 없어요. 임금에게 나의 존재를 알려서 내 한을 풀겠다는 목적의식이 뚜렷하지요. 둘이 좀 다른 성격인 거죠. 또 전우치는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지 않겠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서 진짜 나쁜 놈도 죽이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홍길동은 사람을 죽이는 데 서슴없어요. 나중에 율도국에 가서도 ‘울동’이라는 원주민을 몰살하는 데 거리낌이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도술의 성격이 완전히 다른 거지요. 이런 식으로 서로 비슷한 요소들을 연결하면서도 그 차이를 구별해보는 독해라고 할 수 있겠지요.

Q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심청전에 대한 해석부터가 파격적이었는데요. 과연 “심청의 죽음을 ’효’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을 일깨우게 되는데, 나아가 “심청이 왜 꼭 죽어야만 했을까, 심청은 마조히스트인가?”라는 질문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 같습니다.

사실 중·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고전소설들은 권선징악, 효, 충과 같은 윤리적인 통념에 다 맞추어 해석되는 것들이지요. 이렇게 결론이 정해져 있으니까 읽으나 마나예요. 이거야말로 고전소설을 정말 재미없게 만드는 방식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런 통념에 맞춰 작품을 읽다 보면 납득이 안 가는 면이 있어요. 저는 이런 면들을 밀고 들어가 보면 이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의미가 생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심청전은 전형적으로 효를 설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 지점들이 있어요.

심청은 피할 수도 있는 죽음을 왜 그렇게 고집한 걸까? 공양미 300석을 장승상 댁 부인이 어떻게든 마련해보겠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죽겠다고 가잖아요? 또 죽을 때 분명히 ’나 죽으면 우리 아버지 어떻게 사나’ 그렇게 걱정을 했으면서, 막상 인당수에서 다시 덩실 떠올랐을 땐 뱃사람들에게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잖아요.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이건 효녀의 효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들 때문에 심청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히 효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는 거지요. 제가 여기서 심청은 마조히스트인가라는 질문도 던졌지만, 마조히즘이라는 통념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심청이 그렇게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오히려 심청의 죽음은 약속한 것을 너무 엄격하게 지키는 방식으로 약속 자체를 황당무계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카프카 소설 <선고>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선고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에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하니까 뛰쳐나가 진짜 물에 빠져 죽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선고>를 읽으면서 ’아, 이 사람 효자다!’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지요. 마찬가지로 그런 아버지의 명령 또한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요. 이렇게 명령이나 규범을 너무나 엄격하게 따름으로써 명령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카프카의 비판적 방법이지요. 그렇다면 심청의 죽음도 효라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을 통해 그 명령 자체를 당혹 속으로 모는 역설적 비판의 텍스트로 다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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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에서 심청전과 같은 고전에 ’반인륜적 독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건 이런 의미인가요?

아마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좋은 길인가 하는 것이 인륜, 윤리, 도덕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규칙화되고, 어느 상황에서 누군가는 목숨까지 바쳐서 지켜야 하는 것이 될 때는 더 이상 이건 좋은 삶을 찾아가는 길이 되지 않는 거죠. 충, 열, 효 삼강도 그랬던 거 같거든요. 이렇게 될 때는 그 규범들이 우리에게 좋은 삶을 약속해주는가 하고 반문하는 방식으로 윤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심청전에서 심청이 하는 일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청이 인당수에서 떠올라서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면 정말 그것은 옛날 자기가 떠나온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눈먼 아버지와 함께 맹목적으로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심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를 집 밖으로 불러내잖아요. 기존 윤리의 세계인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를 불러내 그 바깥세상을 보여주고, 심봉사뿐 아니라 모든 맹인, 모든 눈먼 자를 눈뜨게 하잖아요. 이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의 방법, 다른 윤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저는 이 소설이 효에 관한 책이라고, 인륜을 따르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인륜에 반하는 방식으로 읽을 때만 드러나는 인륜이고, 효라는 관념에 대해서도 눈먼 아버지를 따라가는 효가 아니라, 아버지를 눈뜨게 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효를 구성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Q 우리 고전들에서 보여주는 공동체의 모습들에 대해 주목하신 점도 흥미로웠어요. 특히 흥부전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와 심청전에서 나타나는 공동체를 견주어 이야기하셨지요.

흔히 사람들이 흥부전을 형제간의 우애를 다룬 소설이라고 통념적으로 읽는데, 그 점에 대해서 고전문학 하는 분들이 많이 비판했어요. 그런 시도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반면 또 흥부는 나태한 사람이고 놀부는 부지런한 근대적 인간으로 보는 독해, 그래서 오히려 놀부를 진보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맞지 않은 것 같아요. 텍스트를 보면 놀부를 좋은 사람으로 보는 뉘앙스는 전혀 발견할 수 없거든요. 인륜에 빠져서 고전 텍스트를 읽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돈 때문에 형제를 저버리는 사람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 통념(우애)을 벗어나면서도 우리가 사는 시대의 세계관에 두들겨 맞추는 것에서도 벗어나는 독해방식이 없을까하는 고민이 들었는데요.

저는 공동체라는 부분을 심청전하고 비교해 읽는 것도 하나의 독해방식으로 의미 있다고 봐요. 말하자면, 심청전의 가족은 붕괴한 가족이에요.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는 부양할 능력조차 없는 무능한 가족, 해체될 가족이에요. 그런데도 심청네는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공동체가 먹여 살리거든요. 가족보다 더 큰 공동체, 동냥과 같은 증여의 경제로 돌아가는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지요. 근대 이전의 사회는 이렇게 다 공동체 사회였습니다. 공동체를 의미하는 꼬뮨이란 말 자체가 선물로 결합되는 관계라는 말이에요. 즉 공동체는 증여로 특징지어지는 거지요. 반면 흥부전은 공동체는 물론이고 가족도 파괴된 상황, 공동체보다도 못한 가족을 보여줘요. 공동체가 깨지면서 가족도 깨진 상황으로 심청전과는 대비되지요. 흥부전은 교환의 경제, 돈으로 매개 되는 싸늘한 등가관계에서 돈 때문에 형제마저도 쫓아버리는 반(反) 공동체적 행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분노, 징치하고 싶은 욕구, 문제의식 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원래 오래된 공동체는 남은 것을 축적하려는 시도, 그걸 돈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남은 것을 돈으로 축장하게 되면 그 축장으로 남을 지배하게 되고, 한편으로 궁핍을 만들어내게 되거든요. 특히 꽤 길게 서술되는 놀부의 박 타는 사설에서 볼 수 있듯이, 박마다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다 놀부에게 다른 게 아니라 돈을 빼앗아 가요. 여기서 우리는 순환이 아니라 축장에 대한 분노, 축장의 파괴와 같은 당시 공동체의 욕구, 정서를 읽을 수가 있어요. 철학자 바타유는 ’포틀래치(potlatch)’ 문화를 두고 소모야말로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를 흥부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어린 시절 동화로 읽은 콩쥐팥쥐를 떠올려보면 뒷부분 팥쥐에 대한 잔혹한 징벌 이야기들을 읽은 기억이 없어서 <파격의 고전>을 읽을 때 “이런 이야기였어?”하고 새삼 놀라웠습니다. <콩쥐팥쥐전>의 반전과 철저한 복수가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서구의 신데렐라 동화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야말로 환상이잖아요. 어렵게 살던 사람이 왕비가 된다는 환상인데, 그런 환상은 현실이 너무 힘드니까 어디에나 있었던 것 같아요. 황당무계한 것은 미모 하나로 그런 현실이 해결된다는 이야기지요. 콩쥐팥쥐는 보통 신데렐라 이야기의 우리나라 버전이라고들 하는데, 이 점만 보더라도 아주 달라요. 신데렐라에서는 미모의 여주인공을 찾기 위한 매개물이 신발이라면, <콩쥐팥쥐전>에서의 신발은 좀 다르거든요. 얼굴을 본 적 없는 감사가 이 신발의 서기(상서로운 기운)를 보고 신발 주인을 찾으라고 하지요. 또 신데렐라에서는 모든 갈등이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콩쥐도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콩쥐팥쥐전>은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지요.(콩쥐의 결혼 이후 팥쥐는 사과하며 화해한다는 핑계로 감영으로 찾아가 콩쥐를 연못 속에 빠뜨려 죽인다. 콩쥐는 심청처럼 연꽃이 되어 살아나오고 이후 전모가 밝혀진 팥쥐는 잔혹하게 죽게 된다.- 기자 주)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콩쥐가 그렇게 일을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결국 자신이 죽는 원인이 되지 않습니까?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패를 하게 된다는 것, 세상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는 것, 오히려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는 데에만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콩쥐팥쥐전>이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또 저는 이 부분에서 가족적 봉합의 불가능성을 지적하시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지만, 가족관계를 다룬 것들이 많잖아요. 그런 드라마들이 한결같이 가족 안에서의 불화, 사고, 불행들을 다룹니다. 사실 고전들처럼 계모가 없더라도 가족 안에서는 늘 사건이 발생하거든요. 가족 안에서 이런 일들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가족 안에서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지요. 특히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는 이런 요구가 다른 구성원들이 맞춰야 한다는 강요와 폭력으로 나타나게 되지요. 저는 그런 점이 <콩쥐팥쥐전>이나 <심청전>에서 ’눈먼 가장’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해요. 심봉사만 눈이 먼 게 아니라, 콩쥐 아버지도 눈멀었지요. 자기 딸이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역할도 못하니까요. 심지어 장화홍련전에서는 딸을 죽이는 데 공모하기까지 하지요. 이런 가부장제에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이런 불행한 상황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또 반대로 가족 안에 이런 균열과 간극이 있다는 것을 직시할 때만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간극을 넘나드는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고전들은 이런 차이를 망각했을 때 이 구멍이 가족 전체를 망가뜨리는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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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에서 홍길동과 전우치의 도술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변신술과 도술을 사용하는 두 캐릭터가 어떻게 대비되는 지점은 아주 놀랍게 다가왔어요. <홍길동전>과 <전우치전>을 꼭 다시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기존 고전연구에서도 전우치와 홍길동을 비교한 글들이 되게 많거든요. 그런데 대부분 홍길동은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라든지 목적의식이 뚜렷한데 반해, 전우치는 목적의식 없이 왕부터 권력자들을 능멸하고 장난을 치고 다니니까 도술을 전혀 진지하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낮게 평가들 하더군요. 저는 거꾸로 홍길동이 도술을 잘 부리는데, 사람을 죽이는데 너무 서슴없다는 점(율도국에 가서는 ’울동’이라는 동물인지 인간인지 모를 존재들을 몰살시켜버리는 아주 참혹한 짓을 하거든요.)에서 이런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활빈 활동에 대해 예전에 신 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보니 사실 그 양이 얼마 안 되더라고요. 더욱이 홍길동이 팔도에서 활빈 활동을 하며 소란을 피운 게 사실 자신을 드러내서 임금이 알게 하려는 목적이었고, 병조판서 직을 내리면 그만두겠다고 나오니까 ’아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홍길동은 병조판서 직을 받고 활빈 활동을 그만두는데, 그렇다고 자기가 그렇게 한이 맺혔던 신분제를 철폐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고 나서 다시 보니, 전우치는 그런 출세나 명예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거든요. 다만, 권위를 부리거나 남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을 괴롭히는 역할을 할 뿐이에요. 그런 점에서 전우치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전우치전>이 더 양반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는 거죠. <홍길동전>도 양반들이 그렇게 좋아할 소설은 아닌데, <전우치전>은 더 양반들에게 거슬렸던 거 같아요. 고전연구가들은 잘 알다시피 전우치전은 한글본과 한문본이 있어요. 한문본은 양반들이 썼을 텐데 이걸 보면 ’전우치전’이라기보다는 거의 ’반(反)전우치전’이라 할 만해요. 전우치의 활동 이야기는 절반 정도밖에 안 나오고, 나머지는 양반들이 전우치를 혼내주는 장면들이거든요. 반성하는 전우치 이야기이죠. 왜 전우치전은 한문본으로 이렇게 다시 써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홍길동전은 되려 참을 만한데, 전우치전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너무 불편했던 거지요. 전우치 같은 인물이 정서상 더 받아들이기 어렵고 권력자들에겐 견디기 힘든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사회적 저항이라는 면을 두고 본다면, 전우치전이 훨씬 저항적인 측면이 컸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이 책의 부제가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인데요.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요?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답을 찾아야겠지만, 조금 힌트를 주신다면요.

우리가 보기에 심청은 굉장히 윤리적 명령에 잘 따른 것 같지만, 윤리의 틀 바깥까지 굉장히 멀리 나갔던 사람이고, 홍길동은 그 시대의 벽, 가족과도 임금과도 충돌했지만, 실제로는 그 윤리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간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홍길동은 그 당시 지배적인 관념이나 윤리, 도덕, 권력의 바깥을 전혀 보지 못했고, 심청은 그 안에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바깥을 보고 그 바깥으로 나갔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뒤에 나오는 <금오신화>의 인물들이라든지 <최고운전>이 저는 굉장히 좋았어요. 사실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세조 반정 때문에 방랑하면서 살았던 점 때문에, 저자와 인물을 겹쳐서 해석을 많이 하는데, 그렇게 보면 패배자의 쓸쓸한 감정을 많이 주목해 해석하더라고요. 그런 감정이 없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그 인물들이 저는 ’외부자들’, ’바깥을 본 자들’로 읽혔어요. 두 작품 모두 지배적인 가치의 바깥을 본 사람들을 다루고 있고, 생각이 들었고, 그들의 쓸쓸함은 ’바깥을 본 자들이 느끼는 고독함’을 보여주고 있지요.

특히 이런 걸 <유우춘전>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해금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유우춘에게 주인공이 해금을 배우러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유우춘은 이런 걸 배워서 뭐하겠냐고, 명성은 있지만 제대로 알아듣는 이 없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외면을 한탄하지요. 이런 게 바로 ’높이 나는 자의 고독’, ’바깥을 본 자의 고독’일 것입니다. 이런 유우춘 같은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은둔자이지요. 그렇게 안에 있어도 외부자로 남은 자(<최고운전>에서 나오는 최고운이라는 사람은 이런 외부자로 끝까지 남은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지요)라든지, 외부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우리 고전 소설에서 많이 다루었다고 느꼈고, 이 점을 우리가 유심히 눈여겨 봤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Q 마지막으로 북DB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합니다.

제가 이 작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내가 알고 있는 고전이라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여러 판본을 대조해서 읽다 보니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비슷한 경험들을 하실 텐데, 제 책을 보면서 “이 이야기가 정말 이런 거였어?”라고 새롭게 보이는 부분이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서도 제 책을 읽고 “이거 정말이야?”라는 의심을 하시면서 고전들을 직접 찾아 읽어보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 고전들이 먼지 속에 ’다 아는 뻔한 이야기’로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다시 이 시대에 불려 나와 많이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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