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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성공의 조건

  •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한 지인이 얼마 전 비정규직 직원을 한 명 채용했다. 월 150만원의 2년짜리 비정규직인데 200명 가까운 지원자가 몰렸다. 거의 모든 지원자가 야근 가능, 밤샘 가능, 조기출근 가능, 주말출근 가능, 지방출장 가능, 파견근무 가능, 회사 근처 거주 가능, 기숙사 거주 가능이라고 써놓고 있었다. 취업이 절박한 지원자들은 취업사이트가 만들어놓은 이 무례한 선택지에 차마 ‘불가능’을 클릭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심 끝에 예닐곱 명을 골라 면접을 봤다. 면접의 달인이 된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선한 인상에 뜨거운 열정과 헌신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중 관련 분야 경험이 탁월한 지원자 한 명을 골라 채용을 결정했다.

[시대의 창]구조조정 성공의 조건

사장은 이 지원자의 경력과 인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정규직 전환을 적극 검토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름 성의껏 새 직원을 위한 사무공간을 만들어주고 컴퓨터와 사무실 집기도 새로 들여놨다. 새 직원이 출근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반쯤 지났는데 그리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아직 적응기라 그렇겠지. 눈에 띄는 것은 연간 15일 범위에서 쓰게 되어 있는 연차 휴가를 한 달 반 사이에 절반 정도 앞당겨 썼다는 점이었다. 규정상 근무 시작 첫 달에 연차를 쓸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직장을 옮기다 보니 이런저런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겠지 이해하고 넘어갔다.

어느 날 그 직원이 사장실을 노크했다. 약간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음주부터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됐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귀를 의심했다.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찾는 동안 자신의 회사를 ‘봉’으로 이용해 먹었다는 생각이 들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월급은 피땀 같은 내 돈으로 받으면서 업무는 최소한으로 하고 연차 휴가 앞당겨서 다른 회사 면접 보러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마터면 험한 말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더 이상 이 직원과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그 노련한 비정규직을 보내주었다. 절반의 급여에 미래도 없는 그 직원의 입장에서는 배신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한때 아이들이 아빠보다 더 기다린다던 택배 아저씨는 요즘 얼굴을 보기 힘들게 되었다. 현관문 앞에 물건을 내려놓고 초인종만 누르고는 누가 나오거나 말거나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웃으며 인사하고 시원한 물 한 잔 권하던 시절은 머나먼 추억 속에만 남았다. 10년 전 택배 한 건당 기사들에게 돌아가는 수입이 1000원 남짓하던 것이 최근 700~800원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200원의 차이는 인간 대 인간의 10초짜리 소통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소통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위험이 찾아온다. 이제는 초인종이 울리고 인터폰 화면에 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택배인 줄 알고 문을 여는 것이 당연해졌기 때문이다. 택배가 아니라 문 옆에 숨어 있던 강도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계형 자영업이 적정 규모의 세 배인 마당에, 서로 먹고살기 빠듯한 자영업 사장과 시급 6030원의 노동자 사이의 살벌한 긴장관계는 죄 없는 손님들의 마음을 죈다.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이 코앞에 닥쳐 있다. 아니, 이미 진행 중이다. 조선, 석유화학 등 구조조정이 시급한 분야들이 널려 있다. 내부노동시장의 가장 따듯한 곳을 차지해왔던 일부 노조들의 기득권 내려놓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력 감축과 구조조정 자금만 논의되는 것은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졌다. 18년 전 IMF 위기 때 이미 해봤던 것처럼 비효율과 도덕적 해이, 그리고 노동계에 두고두고 남을 불신의 문제가 너무 크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낮다고 하지만, 제조업노동생산성은 OECD 10위권으로 그리 낮지 않다.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은데도 그렇다. 노동이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사측의 경영 능력이고 국가의 정책이다. 아마존이 드론으로 택배를 시작할 때까지 아무 혁신 없이 택배 단가만 낮춰온 기업들,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보다는 무료배송에만 만족했던 소비자들, 전시성 정책에 혈세를 낭비하면서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산업정책을 세우지 못했던 정부는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일까.

10년 후 먹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산업구조의 업그레이드가 절실하다. 그러나 18년 전 방식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국민 혈세와 노동계의 양보에만 기대려 들 것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지불하면서 높아진 생산성을 활용해 그것보다 훨씬 큰 수익을 만들어내는 능력 있는 경영자가 보상받는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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