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복지원 이인자 인터뷰 “원생들은 어쨌든 길거리에서 죽었을 사람들”
AP통신이 보도한 형제복지원 사건 기사의 제목. | AP통신 홈페이지 갈무리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과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4월2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언론이 다뤘습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1987년 부산에 있던 부랑인 강제 수용시설인데요.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감금했습니다. 납치·인신매매 등으로 부랑인이 아닌 사람도 수용됐죠. 이곳에 강제 입소된 사람은 3975명, 현재 확인된 사망자만 551명입니다.
AP통신은 지난 19일 형제복지원의 인권 유린을 다룬 내용의 탐사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AP는 “형제복지원에서의 인권 학대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널리 퍼쳐 있었다”면서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과 수백건의 문서를 분석한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AP는 생존 피해자 최승우씨의 사례를 전했습니다. 경향신문도 최씨를 인터뷰한 바 있습니다. 최승우씨는 14살 때 빵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최씨를 파출소로 데려간 경찰은 가방 안에 있던 빵과 우유를 보며 어디서 훔쳤냐고 다그쳤습니다. 그 빵과 우유는 학교에서 배급한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준 것”이라고 버티자, 경찰관은 “라이터로 몸을 지지려 했다고 한다. 최씨는 집에 가고픈 마음에 훔쳤다”고 말했는데요, 그 길로 형제복지원에 입소했습니다.
AP통신의 형제복지원 사건 탐사보도 기사. | AP통신 홈페이지 갈무리
형제복지원에 들어온 최승우씨는 입소 첫날 밤 직원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5년 동안 거의 날마다 폭력과 노역에 시달렸다고 AP는 전했습니다. 교내 말썽으로 13살 때 끌려온 이재식씨는 형제복지원 간부의 개인 비서 역할을 했는데요. 해당 간부가 박인근 원장에게 하루에 두번 원생 현황을 보고할 때 따라갔습니다. 보고 내용을 들어보면 하루에 사망·부상자가 4∼5명에 달하는 날이 잦았다고 합니다. 전날 원생이 맞아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박인근 원장이 복지원 뒷산에 시체를 매장하라고 지시하는 것을 직접 듣기도 했다고 AP는 전했습니다.
AP는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의 말을 인용해 “원생 90% 이상이 당시 정부가 규정한 ‘부랑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2인자인 목사 임영수씨를 전화 인터뷰했습니다. 현재 호주에 사는 임씨는 “‘문제아’를 청소해 더 좋은 부산을 만든 ‘현신적인’ 사람”으로 박 전 원장을 묘사했습니다. 임씨는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것을 두고 ‘국가 이익의 손실’이라고 했다네요. 임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폭력과 그에 따른 사망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망사건은 원생들 간의 충돌로 발생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사망자수가 많은 것은 당초 입소 당시 원생들의 몸과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임씨는 AP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생들은 어쨌든 길거리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다.”
형제복지원 입구(1989년 촬영)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반면 김용원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원생들을 인터뷰를 했는데요, 원생들은 ‘형제복지원에서는 거의 죽기 직전에도 탈출 우려 때문에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합니다. 김 변호사는 “형제복지원은 박인근 원장의 왕국이었고 폭력이 그곳을 통치하는 방법이었다”며 “누구든 매일같이 두둘겨 맞아 죽는 이들이 발생하는 공간에 갇혀있다면, 강제 노역과 학대, 강간에 쉽게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정부 문서도 대부분의 원생들이 건강한 상태로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AP는 전했습니다. 1985년에는 적어도 15명의 원생이, 1986년에는 22명이 입소 한달 내에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형제복지원 내부 문서에 따르면 1985~1986년 18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중 55명의 사망 증명서를 의사 정명국씨(사망)가 발행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망 원인이 ‘심부전’과 ‘쇠약감’이었습니다. 정씨는 허위진단서를 발부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었죠.
형제복지원 원생들의 간식 시간(1987년 1월 촬영) | 경향신문 자료사진
AP는 또 “단독 입수했다”는 부산시 문서를 인용해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원생들에게 보수를 지급해야 했다고 밝혔습니다. 형제복지원이 원생 강제노역으로 수익을 얻었는데요. 1000명 이상의 원생들에게 170만달러(약 19억5000만원)에 달하는 임금을 지급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AP는 ‘노예 노동(slave labor)’이라고 표현했습니다.
AP는 “정부 고위층에서의 조직적인 은폐로 인해 지금까지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성폭행과 살인에 대해 누구도 처벌 받지 않고 있다”며 “현 정부도 증거가 너무 오래됐다는 점을 들어 야당의 조사 요구를 가로막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천명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보상은커녕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부산에 있는 부랑인 수용소인 형제복지원(1987년 2월1일 촬영) | 경향신문 자료사진
형제복지원에서 1987년 3월 원생 1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구타로 숨졌는데요. 이후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박인근 당시 원장은 1989년 징역 2년6월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살인·폭행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죠. 감금 혐의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선 항상 욕설과 고함이 오갔습니다. 성폭행도 일어났습니다. 밥 먹는 시간, 씻는 시간도 제한됐습니다. 그곳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이유 없이 매를 맞고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를 그린 한종선씨 작품.
2014년 3월 SBS 시사고발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박인근 원장이 복지시설과 헬스장·온천·빌딩 임대업 등을 운영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그러자 같은 해 7월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 등 국회의원 55명이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발의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지 27년 만입니다. 그러나 진행은 더뎠습니다. 지난해 11월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위에서 행정자치부가 사회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특별법 제정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같은 해 12월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와 최승우씨는 쌀포대를 입고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선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쌀포대를 입혔다고 하네요. 쌀포대는 ‘살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눈을 뜬 채 ‘악몽’을 꾸는 사람들···형제복지원 피해자 단식 농성)
2015년 12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왼쪽 사진)와 최승우씨가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2015년 12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왼쪽 사진)와 최승우씨가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 정희완 기자
한종선씨는 형제복지원의 피해 실태를 알리기 위해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기도 했죠. 형제복지원의 아픔을 곱씹는 과정에서 깨달은 사회 부조리, 성찰을 그는 거친 소묘에 담아냈습니다. (▶“악마는 태양과 함께 왔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그림전’)
19대 국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상규명,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