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뉴스큐레이션사이트 ‘향이네’는 한국 사회 안팎의 혐오 문제를 진단하고 성찰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전문가·활동가 기고로 성소수자·여성에 대한 혐오 문제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봅니다.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대안도 제시합니다. 연재글 의견은 h2@khan.kr.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4·13 총선을 앞두고 ‘여성 혐오’ 논란을 부른 선거 홍보 광고. 가수 설현이 출연한 위 광고는 “여성이 정치·사회문제만큼 중요시하는 것이 화장품, 즉 외모라는 성별고정관념”에 기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래 광고는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투표독려 영상으로 비판받았다.
혐오와 적대가 아닌, ‘평등의 정치’를 시작할 때 ―20대 총선의 여성혐오 양상을 돌아보며
■여성을 ‘2등시민’으로 재현하는 선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예상치 못한 ‘여소야대’로 귀결된 20대 총선. 의외의 통쾌함에 쾌재를 부른 많은 이들의 환호성과 안도의 한숨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제는 좀 차분히 돌이켜봐도 좋지 않을까. 20대 총선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나.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선거로 상징되는 대의제의 판타지가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잃은 지는 꽤 오래됐다. 선거는 언론과 재벌과 거물 정치인들의 정치공작이 판치는 이벤트에 불과하며, 선출된 대표자들이 시민의 권익과 이해관계를 여실히 대변해줄 거라는 기대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선거철만 되면 미디어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행사하는 ‘소중한 한 표’를 빼놓지 않고 포착한다. 생애 첫 투표를 하는 대학생, 지팡이를 짚은 110세 최고령 노인, 자랑스럽게 투표용지의 글자를 읽는 귀화 외국인, 주민등록번호 뒷부분의 숫자가 1에서 2로 바뀐 트랜스젠더, 테니스에 흠뻑 빠진 줄만 알았던 전직 대통령까지도 모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한 표를 행사한다. 이처럼 선거 날 미디어가 전시하는 것은 ‘1인 1표’로 상징되는 보통투표와 평등투표의 환상이다. 그리고 이로써 선거는 평소 각자도생에 몰두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사축(社畜)들과 속물들, 잊힌 영웅들과 악인들마저 ‘시민-됨’을 실천하게 하는 예외적인 순간이 된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우린 곧 같은 세계에 살게 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 요컨대, 여염의 갑남을녀들을 순식간에 ‘시민’으로 호출하는 것, 이것이 선거가 지닌 마술적인 효과다.
그러나 이 엄청난 ‘가시화(visualizing)’의 프로젝트에서 누군가가 상시적으로 누락된다면? 민주주의의 공백이 질문되는 것은 바로 이때다. 그리고 이것이 2016년 한국의 20대 총선에서 여성-시민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이미 지역구 여성후보 30% 공천, 비례대표 남녀 교호순번제 같은 당헌·당규까지 간단히 무시한 채 치러진 총선이다. 드물게 지역구에 입후보한 여성정치인들은 새누리당 김을동 후보처럼 “여자는 똑똑하면 밉상”이라는 반여성적 주문을 외우거나, 손수조 후보가 그랬듯 할아버지뻘 남성의원에게 업혀 ‘참한’ 손녀딸 혹은 며느리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의 손혜원 후보가 아들과 조카까지 등장시켜 ‘국민엄마’ ‘국민고모’ 운운하는 가족정치에 참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여성유권자를 화장품 소비에만 몰두하거나, 순진한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개념 없는’ 존재로 등장시킨 투표독려 영상을 제작해 물의를 빚었다. 게다가 정의당이 총선테마송으로 선정한 ‘중식이밴드’의 노래에 여성혐오적 가사가 포함된 것이 알려지면서 ‘여성혐오’는 이번 총선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아재정치’ 혹은 ‘가족정치’로 불릴 만큼 외모마케팅이나 성희롱에 가까운 수사학으로 점철된 이 선거정국에서 여성은 성적 존재로 고정되거나 이성애적 성규범의 매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재현되지 않았다. 이번 20대 총선은 ‘여성은 온전한 정치적 주체가 아닌 2등 시민일 뿐’이라는 오랜 명제를 새삼 곱씹게 함으로써 여성들에게 또 한 번의 실망의 계기로 각인됐다.
■‘남성’의 얼굴을 한 청년
이 글은 일일이 사례를 들기도 구질구질한 이 여성혐오 정국에서 딱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여성혐오 사례들 대부분이 거의 모든 정당들이 채택·수용한 지배적인 청년표상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살펴보건대, 이번 총선에서 대부분의 정당들이 선보인 청년표상은 놀라울 정도로 납작하고 획일적이다. ‘청년’은 비정규직 혹은 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약자로 규정되며, 그 때문에 연애·결혼·출산은 물론 꿈과 희망도 포기한 ‘N포세대’로 묘사된다.(▶[新허기진 군상](2)미래 없는 청년들-남한테 손 안 벌리고 살면 됐다고 생각…그런데 왜 잠이 안 올까요)
경향신문 2015년 10월 기획 [新허기진 군상](2) 미래 없는 청년들에 소개된 20대 남성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이는 물론 2000년대 중반 ‘88만원세대’라는 용어로 폭넓게 호명된 청년담론의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일정 나이가 되면 섹스를 하고 가족을 이룬다는 인구경제학 모델을 차용한 이 논의가 상정하는 것은 생애주기에 따라 가부장(생계부양자)으로 성장하는 ‘남성’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논리에서 (남성)청년은 ‘섹스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성적·경제적 약자’로 인식돼왔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처럼 남성이 스스로를 약자화·피해자화하고 그 표상을 한국 정치가 ‘평균시민’의 상으로 추인하면서, 이 남성성은 곧 자명한 것으로 통용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섹스상대를 구하는 시스템이 ‘자유시장화’하면 할수록 많은 남자들이 성적 약자가 된다’는 ‘성적 약자론’을 언급한다. 이것이 많은 남성들에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성적 약자’로 취급된다는 것, 즉 ‘내 여자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남성적이지 못한 것이라는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규범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는 여성도 성적 약자일 수 있다는 점은 물론, 사태의 궁극적인 동인(動因)인 ‘자유시장화’의 원인과 책임을 묻는 일이 간단히 생략된다. 이제 남은 것은 군대도 안 가는 ‘무임승차자’ 주제에 쉽게 ‘섹스해주지 않는’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역차별의 담론을 생성시키는 일이다.(▶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청년담론의 성별에 대한 이런 정치적 무의식은 최근 ‘한국여자’라는 제목이 달려 화제가 된 현대미술가 이완의 사진에도 잘 드러난다. 모텔과 소주방이 즐비한 밤거리에 검정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디올 상표의 명품백을 들고 서 있는 사진. 이 사진은 많은 이들에게 ‘성판매를 통해 쉽게 돈을 벌어 명품백을 구입하는, 허영과 과시욕에 찌든 여성을 한국여성의 상징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됐다. 작가는 “광고에 흔히 나오는 화려한 배경”이 자아내는 “판타지”가 아닌 “패션잡지에 행인들 패션이 소개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모티브로 했다”고 해명했지만, 이 작품에 제기된 여성혐오의 혐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면 물을 수 있다. 디올 가방을 구매하는 ‘젊은 여성’에게 부여돼온 ‘허영’과 ‘사치’라는 지배적 혐의에 대해 예술가로서 그는 어떤 재현의 금기에 도전했고, 어떤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나. 기실 여성의 소비행위에 깃든 모종의 열정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인문학적·예술적 탐구는 끊임없이 시도돼왔다. 페미니스트 문학연구자인 리타 펠스키는 소비의 성애학을 추구함으로써 상상적 쾌락을 성취하며 젠더질서의 전복을 기도하는 여성소비자의 주체화 전략을 설파했는가 하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도 여성의 소비자운동을 통한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고루 지적해왔다. ‘여성과 소비’를 둘러싼 이 다양한 모색 중 어떤 것, 혹은 그 밖의 무언가를 이 ‘예술작품’은 건드리고 있나.
이완 작가가 디올 전시회에 내놓은 ‘한국여자’라는 제목의 사진.
마찬가지의 질문을 ‘청년의 얼굴’을 ‘남성의 얼굴’로만 상상해온 한국의 청년담론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국 정치계에도 물을 수 있다. 선관위가 내세운 ‘정치에 무관심한 채 화장품 구입에만 골몰하는 여성’, 혹은 중식이밴드와 정의당이 끝내 철회하기를 거부한 “빚까지 내서 성형하는 소녀들”이라는 표상은 한국정치가 유권자로서의 여성을 호출하면서도 여성을 시민의 목록에 기입하기를 거부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우리 사회가 김치녀라는 판타지만 남겨둔 채 정작 다양한 여성주체들은 체계적으로 망각하고 있다”는 여성학연구자 윤보라의 말대로, “여성은 ‘할 것 다 하고 쓸 것 다 쓰는 된장녀’이기 때문에 ‘고통 받는 청년세대’에 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며, 이는 자명한 명제처럼 관철돼온 ‘남성 생계부양자모델’에 입각한 것이다. 해소되지 않는 남녀 간의 임금격차나 여성 비정규직 비율을 굳이 늘어놓지 않더라도,‘ 노동의 여성화’ 혹은 ‘빈곤의 여성화’야말로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가 공모한 이 현실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다. 실상이 이런데도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을 비가시화한 채 여성을 그저 무임승차자나 피부양자로 표상하는 것은 대체 어떤 정치적 비전에 입각한 것일까.(▶여성 대통령 3년, 여성 지위는 ‘뒷걸음’)
게다가 이 같은 여성-청년의 비가시화는 2008년 ‘촛불소녀’부터 ‘배운 여자’, 그리고 ‘메갈리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정치적 주체화에 도전해온 여성들의 치열한 역사를 삭제한다. 어머니나 누이, 노동자의 아내, 혹은 며느리나 예비신부와 같은 고정된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고 ‘시민’으로 기입되고자 분투했던 여성들의 역사 말이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적 교환체계에 입각한 라이프패턴의 자연화에 저항하며, 다양한 주체화의 모델과 삶의 방식을 개발해왔다. 한국정치가 진정 청년-여성의 시민권 보장에 관심이 있다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5년 발표한 ‘성별 임금 격차와 시사점’ 보고서. 남녀 임금차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남녀 간 특성 차이보다는 ‘사회정서적 남녀 차별의 요인’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됐다.
■‘진보’ 정치인들의 ‘안전한’ 선택
두 번째로,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해온 것으로 알려진 표창원 후보가 “성경에서 금지한 동성애가 이 사회에 확산되는 것에 반대한다”며 동성애혐오 발언에 동참한 것, 그리고 중식이밴드의 총선테마송 논란을 둘러싸고 정의당 내에서 “정의당은 페미니스트 당이 아니다”라는 발언이 나왔던 것을 한국 민주주의의 위험한 현 상태를 말해주는 아주 나쁜 신호로 기억하고자 한다. 두 사례는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도 기득권의 표심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언제든지 소수자의 시민권을 삭제·유예할 수 있음을 보여준 징후적인 사건들이다.(▶[혐오사회]선거운동이 남긴 ‘성소수자 혐오’)
가장 나쁜 것은, 진보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일부 “피해의식에 찌든” 이들의 ‘열폭’이나 과격한 ‘꼴페미’들의 언동쯤으로 치부한 채,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는 소위 ‘온건하고 합리적인 다수’의 감각에 충실하는 것이 더 안전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 대상에 대한 전략적 혐오가 정치적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반인간적 상상력이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이 잘 분석한대로, 혐오는 뿌리 깊은 차별과 배제의 구조 및 역사에 기반해 “사회적 위계를 만들어내는 유해한 방식”이다. 그리고 만일 선거가 비합리적인 ‘다수의 감각’에 기댄 채 무성찰적으로 소수자를 2등시민 혹은 비국민으로 재현한다면, 선거는 곧바로 혐오를 적극적으로 생산해내는 반민주적·반인권적 국가장치로 기능할 수도 있다. 이것이 퇴행의 시대에 직면한 ‘선거의 역설’이다.
특히 여성혐오의 전략화가 위험한 것은, 여성학자 임옥희가 잘 지적했듯 여성혐오야말로 “모든 혐오에 유비적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서 언제나 성별의 수사학이 동원되듯, 여성혐오에 깃든 멸시와 배제의 동학(動學)은 곧 외국인, 성소수자, 장애인, 전라도민, 좌파는 물론, 철거민이나 세월호 유가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타자화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지배블록이 마치 도미노처럼 이 모든 혐오의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거나 ‘외계인이 침공하는데 우리끼리 싸울 수 없다’는 논리로 여성과 성소수자의 시민권을 유예하려는 기획은 진보진영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반복돼왔다. 그러나 이처럼 소수자의 정치적 주체성을 탈각시킨 채, ‘전선 앞에서의 단결’을 외치며 차별과 배제를 승인하고 그에 공모하는 것은 이 세계를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동질화하려는 우파적 세계관과 종이 한 장의 차이만 지닐 뿐이다. ‘여성’의 시민권을 반납한 이들은 언제 또 노동자, 철거민, 장애인, 외국인의 시민권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할지 모른다. 그때에도 이들은 여전히 ‘진보적’일까.(▶[페미니즘이 뭐길래]‘청년진보논객’ 데이트폭력에 부쳐)
중식이밴드 여성혐오 논란을 두고 정의당 당원게시판에 올라온 글. | 정의당 당원게시판·미디어오늘
중식이밴드의 가사를 둘러싸고 일부 정의당원들은, ‘과민한 소수 여성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많은 이들의 판단의 자유가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해석의 자유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 문제가 여성의 시민권 위협과 직결된 현안이라는 여성-시민의 판단을 기각하는 이 둔감함, 여성을 동등한 시민적 주체로 상상하지 못하는 이 평등에의 무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성학자 정희진은 ‘표현의 자유’란 본래 ‘언어를 갖지 못할 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당파적 권리임을 갈파한 바 있다. 그리고 일본의 혐오발화에 대한 법적 대처를 고민해온 모로오카 야스코는 “평등이 없는 상태에서 특정인만 자유를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인권이 아니라 특권”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는 ‘자유에 대한 과잉학습’과 ‘평등에 대한 과소학습’, 그 불균형이 의미하는 바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에 이른 것 같다.
■이제 ‘평등의 정치’를 시작할 때
선거 전의 우려와 달리, 20대 총선에서 여성 국회의원의 수는 51명, 전체의 17%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는 여성정치인의 양적 확대가 질적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충분히 의미심장한 일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라거나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자그마한 희망을 제외하면, 20대 총선에서 ‘평등의 정치학’을 상징하는 어떤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결국 20대 총선에서 벌어진 혐오의 양상은 다양한 주체들의 시민권을 상상하는 데에 있어서 한국정치의 임계치를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남자를 남자로, 여자를 여자로, 노동자를 노동자로, 재벌을 재벌로,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성소수자를 성소수자로만 머물게 하는 이 결정론적 존재론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그저 야만일 뿐이다. 이 모든 주체들이 ‘시민’이 되는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 정치 아니었던가. 이제 혐오와 적대를 그만두고, 진짜 ‘정치’를 시작하자.
▶1회 2016, 선거운동이 남긴 ‘동성애혐오’(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
▶2회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기는 불안한 세계(이나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3회 정계-재계-보수 개신교계의 혐오선동 네트워크(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4회 혐오와 적대가 아닌, ‘평등의 정치’를 시작할 때(오혜진 문화연구자)
▶5회 페미니스트 정치, 각축하고 손잡고 버티고 살아남기(김은희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6회 겹겹의 젠더 불평등 해소, 남성에게만 맡길 것인가?(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