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2002, 컬러프린트, 120x120㎝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생선을 손질하던 중년 여성은 상념에 잠겨 있다. 펑퍼짐한 홈드레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스스한 커트 머리, 잘려나간 생선 대가리와 피 묻은 도마.
“우리 집 부엌에서 내 옷을 입혀서 촬영했어요. 모델은 내 친구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이혜경이지요. 사진을 찍을 때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쓰는데요. 이 작품은 가족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다가 1980년 광주항쟁 때 실종된 아들을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사진가 박영숙씨(75·사진)는 ‘미친년 프로젝트’의 9개 연작 가운데 세번째인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의 첫 작품인 이 사진(2002년작)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미친년 프로젝트’는 1999년, 그의 나이 58살에 시작됐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연작인 ‘미친년들’과 ‘상실된 성’에서는 특별한 배경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여성들을 찍다가 이 연작부터 배경과 연출이 중요해졌다. ‘박영숙’ 하면 ‘미친년’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해진 이 프로젝트는 그 이후 ‘화폐개혁프로젝트’ ‘게이 그리고 레즈비언’ ‘헤이리 여신 우마드’ ‘오사카와 도쿄의 페미니스트들’ ‘꽃이 그녀를 흔든다’ ‘내 안의 마녀’ 등 2005년까지 이어진다.
그가 자신의 대표작 80여점을 모은 회고전 <미친년·발화하다>를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천안시 만남로)에서 열고 있다. 2006년 사진전문 트렁크 갤러리(서울 북촌로)를 열면서 10년간 작품 활동을 멈췄던 터라 전시작은 2005년에서 정지됐다. 박씨는 “사진이 회화에 비해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후배들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한다는 생각으로 갤러리를 열었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다”며 “당초 목표를 이룬 만큼 이번 전시를 계기로 갤러리를 접고 다시 작품 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미친년’들을 한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건 감회가 깊다. 1980년대 본격화한 여성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미친년’이 됨으로써 질서를 위반하고 자유를 찾자는 외침은 큰 변화를 불러왔다. 여성 지위는 크게 향상됐고 여성들의 자기주장과 사회진출로부터 불안을 느낀 일부 남성들을 중심으로 여성혐오까지 등장하는 시점이다. 그러나 성 대결이라는 퇴행적 경향으로 인해 ‘미친년’의 외침은 더욱 되새겨볼 만하다.
“내가 찍은 ‘미친년 프로젝트’는 우울하기보다 신나는 기획이었습니다. 당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요. 미친년을 부계사회의 역사적 산물로 생각하고 미친년을 연기함으로써 현실로부터의 일탈적 해방, 감정이입적 환상의 유희를 감행한 것이지요.”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이 부엌, 안방, 화장실, 베란다 등 일상생활 공간에서의 상념을 통해 정신적 탈출을 감행한다면, ‘꽃이 그녀를 흔든다’(2005년작) 연작에 나오는 여성들은 야외 꽃밭에서 보다 과감한 해방의 몸짓을 취한다. 박씨는 “아름답고 연약하다는 점에서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관념을 전복하고자 했다”면서 “며느리밥풀꽃의 슬픈 전설처럼 꽃은 여성의 광기와 고통으로부터 피어났다”고 설명했다. 그의 가까운 동료인 김혜순 시인의 ‘꽃이 그녀를 흔들다’에서 제목을 따왔다. ‘땅이 미치지 않고 어찌,/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 여자의 몸에서 올라오는 꽃/ 광기가 꽃을 피게 한다’
박씨는 한국 1세대 여성 사진작가로 25살인 1966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박영숙 개인전’이란 첫 전시를 가진 이후 50년간 활동해왔다. 초기에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주로 찍다가 1979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만난 ‘36명의 포트레이트’를 찍으면서 인물사진으로 전향했다. 이제하 구효서 김금지 박정자 등의 젊은 시절 모습이 남아 있다. 그 후 윤석남 김혜순 김영옥 정정엽 권은선 등 페미니스트들과 ‘영매’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여성주의 사진가로 거듭났다.
그는 “두 아들이 엄마 때문에 우리 삶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이제 남성들도 과거 여성들처럼 정해진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미친놈 프로젝트’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자기 세대 여성들의 삶에 대한 관심도 여전한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인물과 오브제를 함께 찍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27일 오후 5시 작가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 김은실 이화여대 교수 등이 참여해 페미니즘 미술 담론을 살펴보는 ‘언니들의 수다’가 열린다. 전시는 7월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