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이 끝나자마자 정부는 조선, 해운 구조조정의 칼을 뽑았다. 해운업의 위기는 2008년 이후 세계적 불황으로 인한 해운 수요의 정체, 그리고 과거 호시절에 체결했던 비싼 용선료에 기인한다.
한진해운의 최은영 전 회장은 좋은 시절에 이익과 후한 퇴직금을 다 챙겨 놓고, 사태가 악화하자 재빨리 주식을 처분해 지탄을 받고 있다. 재벌은 평소 약소한 지분을 갖고도 회사 경영권을 장악하고 주인 행세를 한다. ‘황제 경영’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 아닌가. 그런데 막상 위기가 오자 나 몰라라 도망가는 모습은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사람의 행동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일관성이 있어야 존경을 받는다.
조선업 역시 세계적 불황으로 선박 수요는 크게 줄었는데, 공급능력은 과잉이라서 생긴 문제다. 이웃 경쟁국인 중국,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구조조정에 나서 군살을 많이 뺀 반면 우리는 오래 방치한 결과 조선 3사의 적자와 부채는 삽시간에 천문학적 수준이 돼버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이 세계 조선업의 1, 2, 3위를 차지해 자랑거리였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러한 문제를 시장에 맡겨두면 회사끼리 서로 양보, 타협해서 해결책을 찾기는커녕 이른바 ‘배짱 시합’(chicken game)을 벌이므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시장의 실패가 나타날 때는 정부가 나서서 조정을 해줘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수수방관해온 책임이 크다.
특히 3사 중 부실이 가장 심한 대우조선은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한 회사이므로 관리·감독 책임이 산업은행에 있는데, 산업은행은 스스로 책임을 방기해왔을 뿐 아니라 대우조선의 고위직에 자기 사람들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데 열중했으니 이번 사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청와대도 책임이 크다. 청와대는 산업은행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비전문가를 단지 2012년 대선 때 도와줬다는 이유로 산은 총재에 연달아 임명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위기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경영자, 정부, 청와대, 산업은행 등이다. 그런데 정부는 정공법을 외면한 채 한국은행더러 돈을 찍어내어 산업은행의 채권을 사주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정부는 이것을 양적 완화라고 우기고 있다. 양적 완화는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제로 금리까지 떨어졌을 때 경기를 살리기 위해 쓰는 최후의 비상수단인데, 한국은 제로 금리도 아니고 산업의 구조조정 문제에 양적 완화를 들이대는 것은 경우가 맞지 않다.
돈을 찍어내면 세금이 아니라서 국민들 부담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다. 돈을 풀면 결국 물가가 오르고 그 피해는 국민이 부담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무원칙한 편법이자 역대 독재정권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나쁜 관행이다. 한국은행은 처음에는 반대하더니 체력이 약한 지 며칠을 못 버티고 딴소리를 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이래서는 중앙은행 자격이 없다. 문제를 제대로 풀려면 우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러자면 공적자금 투입으로 가는 게 맞고, 그래야 국회의 심의 과정에서 책임 소재를 가려내고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이지만 그래도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밝혀야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피해는 약자에게 집중된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과 거제도, 울산의 식당과 상인들이 피해를 덮어쓰고 있다. 노동자 중에서도 맨 먼저 벼락을 맞는 것은 가장 약한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한사코 구조조정에 저항할 텐데, 그것은 퇴직 이후 살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실업급여가 박약한 한국의 현실에서 구조조정은 거의 사람 목숨을 빼앗는 것이니 결사적 저항을 나무랄 수 없다. 우리가 구조조정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평소 복지국가를 기피하고 사회안전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복지국가는 사회안전망이 있어 구조조정에 저항이 적다.
2003년 스웨덴의 조선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말뫼에 있던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한국의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팔렸다. 크레인이 분해되어 배에 실려 떠나던 날 말뫼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는 2004년 말뫼 방문 시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말뫼는 신재생에너지, BT, IT 중심의 친환경 생태도시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복지국가이기에 이런 변신이 쉬웠다. 복지국가는 구조조정 하기 쉬우나, 한국과 같은 비복지국가는 구조조정 하기 정말 어렵다. 우리가 위기를 당해 이 교훈 하나는 꼭 마음에 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