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화장실 살인’ 일파만파
“묻지마 살인의 타깃은 왜 항상 약자인 여성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오늘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내일은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혐(여성혐오)은 이제 여성의 생존 문제입니다” “그놈이 다른 데서 일했다면 내가 죽었을 수도 있겠지”.
“명복을 빕니다” 시민들이 18일 서울 강남역에서 서초동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의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포스트잇 수백 개가 붙었다. 포스트잇에는 전날 새벽 강남역 인근 주점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비판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날 오전 6시쯤만 해도 포스트잇이 네다섯 개에 불과했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식이 확산되고 점심부터 많은 시민들이 방문하면서 점점 늘어나 외벽을 가득 채웠다. 두 손을 몸 앞으로 모으고 숙연한 자세로 포스트잇을 읽거나 한숨을 쉬고 눈시울을 붉히는 시민들이 많았다.
살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김모씨(34)는 경찰 조사에서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범행 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지만 상당수 기사들은 김씨와 여성 피해자가 모르는 사이라는 이유로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했다.
이곳을 찾은 시민들은 이번 사건이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여성혐오가 드러난 범죄라고 주장했다. 경기 수원에서 직접 찾아와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라는 문구를 포스트잇에 써 붙인 여성 ㄱ씨(27)는 “여성을 겨냥한 범죄가 만연한데 계속 ‘묻지마 살인’으로 포장된다”며 “정신병자가 ‘묻지마 살인’을 한 게 아니라 한국의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달려왔다는 ㄴ씨(24)는 “한국에서 여성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유진씨(24)는 “피해자가 또래여서 더 내 일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곳을 방문한 시민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남성도 있었다. 한모씨(25)는 “(범인과) 같은 남자라는 게 싫고 미안하다”며 “약자인 여성이 당했다는 게 슬프고 안타깝다”고 했다. 또 다른 남성은 “다시는 남성의 여성혐오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포스트잇을 써 붙였다.
퇴근길인 오후 7시가 넘어가자 시민들은 바닥에 촛불을 켜고 추모의 뜻을 이어갔다. 한쪽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죽은 당신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익명의 조화도 놓였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도 방문해 포스트잇의 문구들을 읽어본 뒤 트위터에 “슬프고 미안합니다”라고 썼다.
공용화장실 논란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SNS상에는 “‘남녀공용화장실 없애버렸으면”, “공용화장실은 여자한테 위험한 거 아닌가”, “남녀 공용화장실을 사용했는데 문틈 사이로 절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봤어요” 등의 글도 올라오고 있다.
서초경찰서는 이날 김씨가 2008년부터 정신분열증·공황장애 등으로 4차례 입원한 기록을 공개했다. 서초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2008년 수원 모 병원 1개월, 2011년 부천 모 병원 6개월, 2013년 조치원 모 병원 6개월, 지난해 8월부터 올 1월까지 서울 모 병원 6개월 등 4번 입원치료를 받은 기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