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전부 다 거짓말인 건 아니지? 그렇지? 뭐라고 말을 좀 해봐!”
“정말 미안하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는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곁에 있던 가족과 경찰관이 부축을 했지만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렇게 2년 넘게 이어진 거대한 사기극이 막을 내렸다. 재벌가 자제와 평범한 집안 여성의 결혼이라는 신데렐라 스토리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요가 강사 ㄱ씨(27·여)가 지인을 통해 외제차 동호회 회원 김모씨(35·남)를 소개받은 건 2013년 10월이었다. 김씨는 자신을 재벌가의 방계 자손이라고 소개했다. 국내 10대 그룹 총수의 장인인 유명 대부업체 회장이 자신의 외할아버지라고 했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 들어와 대학병원 신경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김씨에게 ㄱ씨는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결혼을 의논하는 사이가 됐다.
김씨는 부유층 자제답게 씀씀이가 컸다. 김씨는 어느날 118억원이 들어있는 본인 명의의 예금 잔고증명서를 ㄱ씨에게 보여줬다. 외할아버지 회사에서 공짜로 차를 사용하라고 보내줬다며 외제차 차량등록증을 보여주기도 했다.
데이트를 할 때는 벤틀리, 벤츠, BMW, 아우디 등 최고급 외제차를 수시로 바꿔 타고 다녔다. 차를 몰고 온 운전기사는 김씨에세 깎듯하게 인사하며 ‘큰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ㄱ씨는 김씨의 신분과 재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가짜였다. 김씨는 학습지 교사 경력이 있는 백수에 불과했다. 2004년에 결혼해 딸과 아내도 있는 유부남이었다.
학습지 교사를 하며 우연히 강남 부자들의 세계를 알게 된 김씨. 그는 자신도 부자인 것처럼 으스대고 싶은 마음에 리스로 외제차를 마련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외제차 동호회 활동을 하며 사귀게 된 이들에게 김씨는 자기 직업을 의사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시작된 거짓말은 김씨를 점점 심각한 범죄의 길로 이끌었다.
김씨는 외제차 동호회 회원의 소개로 만난 ㄱ씨와 덜컥 결혼을 약속했다. 그는 명품 시계를 예물로 산다고 ㄱ씨에게 2000만원을 받아 롤렉스 시계를 샀다. 명품 가방과 넥타이, 구두 등도 선물 받았다. 예단비로도 5000만원을 요구해 받아냈다. 김씨가 뜯어낸 금품은 1억원에 달했다. 돈은 모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ㄱ씨를 돌봐온 형부와 언니가 부담했다.
김씨가 ㄱ씨에게 2000만원을 받아 구입한 롤렉스 시계. 김씨는 이 시계를 차고 다니다가 중고로 팔아넘긴 뒤 생활비로도 썼다. 강남경찰서 제공.
간혹 김씨의 거짓말에 ㄱ씨와 가족들이 의심을 하면 김씨는 곧바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증거나 사건을 만들어 상황을 모면했다. 위조한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보여주며 서울 청담동에 신혼 살림을 차릴 40억원짜리 아파트를 샀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김씨는 역할대행 전문 사이트에서 사람을 구해 ‘가짜 부모님’ 연기를 하게 한 뒤 양가 상견례도 치렀다. 회당 10만원 내외의 돈을 받고 동원된 가짜 예비 시아버지·시어머니는 여러 차례 전화통화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만남을 가지면서 ㄱ씨와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김씨는 가짜 부모님들이 재력가 연기를 완벽히 소화할 수 있도록 가족 내력 등 사전 정보를 꼼꼼히 안내했다.
이들의 사기행각은 결국 결혼식을 앞두고 자꾸만 식을 연기하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꼬리가 밟혔다. 지난해 4월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고 청첩장까지 인쇄한 김씨는 갑자기 어머니가 위암 수술을 위해 미국에 가야 한다며 식을 미루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 뒤로도 김씨가 1년 가까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혼식 얘기를 피하자 ㄱ씨와 가족들은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 김씨는 ㄱ씨 집안에서 신혼 집 마련 자금 5억원을 받기로 하고 지난 16일 서울 강남의 한 레스토랑으로 나갔다. 김씨는 이 자리에도 가짜 부모님을 대동했다. ㄱ씨와 ㄱ씨 형부·언니·어머니 등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경찰은 김씨를 체포했다.
김씨가 체포당하는 순간에도 김씨에게 고용된 가짜 엄마는 “이게 뭔 일이냐. ○○아 너 왜 그러니, ○○아!”라고 울먹이는 등 끝까지 연기를 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집에서 혼자 가만히 있으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진짜 의사인지, 학습지 방문교사 출신의 백수인지…”라고 진술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25일 김씨를 사기와 공문서·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한 가짜 부모 역할을 하며 김씨를 도운 김모씨(59·여)와 이모씨(60)씨를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