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가 걷던 길, 끊어진 듯 이어진 ‘사람 사는 세상’의 꿈
지난 21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는 갑작스럽게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다. 5월 중순, 아카시아꽃들이 지천으로 만개한 여름의 초입에 몰려온 30도를 넘나드는 폭염이었지만 ‘동행 70인’의 행로를 막아설 순 없었다.
지난 21일 작가 박태순 선생과 함께한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첫 방문지인 경북 안동 퇴계 선생 태실로 들어서고 있다.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태실의 바깥채에 해당하는 노송정이다. 안동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이른 아침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학교수와 판화가, 중학생 아들의 손을 잡은 중년 부부, 그리고 이미 동행 마니아를 자처하는 ‘동행족’들까지 모두 설레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이날의 행로를 화제로 들떠 있었다.
이번 동행은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퇴계 이황 선생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 조선 성리학의 산실이자 메카로 불리는 경북 안동과 영주를 아우르는 빡빡한 코스. 동행을 이끈 사람은 국토기행으로 유명한 박태순 작가(74). 서울을 7시경에 출발한 버스는 주말을 맞아 유원지로 향하는 차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첫 기행지인 경북 안동의 퇴계 선생 태실에 도착했다. 들녘과 개천을 앞에 두고 우뚝한 뒷산의 소나무들은 푸르름을 더해 퇴계 선생의 기품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안동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동행인들을 가장 먼저 맞은 것은 솟을대문. 솟을대문에는 성림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성림문(聖臨門), 글자 그대로 성인이 태어난 곳. 성현이 탄생한 곳에는 태몽의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곳 퇴계 태실에도 성현의 강림을 알리는 이야기가 전한다.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께서 임신 중에 꿈을 꾸었습니다. 박씨는 공자께서 70제자들을 이끄시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 태실을 지키고 있는 이건창씨(71)의 설명이다. 그는 퇴계 선생의 할아버지인 계자, 양자 어른의 18대 종손이다. 대구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이곳 태실에 머물고 있다. 태실은 1454년 퇴계 조부 이계양이 단종 2년에 지었다. 이계양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진저리 나는 살육의 한양을 떠나 이곳 안동으로 낙향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후에 퇴계 선생이 태어나 조선 성리학의 거두가 되면서 태실로 부르게 됐다. 지금도 조선 왕가의 왕이나 대군, 공주들의 태를 전국의 곳곳에 보존하고 있지만 왕족이 아니면서도 태실을 보존하고 있는 이는 퇴계 선생이 유일하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태실과 일반적인 왕실의 태실은 다르다. 왕족의 태실은 태어날 때 자른 태를 보존하고 있지만 이곳은 태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장소임을 알리는 태실이다. 즉 출산 방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실보다는 퇴계 종택을 많이 찾는다. 그런데도 ‘동행’이 이곳 태실을 먼저 찾은 데는 태중 교육의 중요성도 한몫했다. 이건창 선생은 “10개월을 이곳에서 퇴계 선생을 임신했던 박씨부인은 태실에서 단순히 임신부로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곧고 올바르게 몸가짐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운 백성들을 이끌 성현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그 의지와 바람이 이곳 태실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태실은 퇴계 선생 탄생 이후 500여년 동안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지난 21일 열린 ‘70인과의 동행’ 마지막 코스인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 앞 솔밭에서 작가 박태순 선생(가운데)과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안동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태실의 바깥채는 노송정이라 부른다. 노송정에는 해동추노(海東鄒魯)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곳이 해동, 즉 조선의 맹자와 공자가 태어난 곳이라는 설명이다. 이황 선생을 중국의 공자와 맹자에 비겨 추앙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노송정 기둥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많은 주련이 걸려 있는데 자식들과 제자들에게 학문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그중에서도 다독(多讀) 다량(多量) 다작(多作)이라는 3다 학습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퇴계 태실을 나온 일행은 청량산 입구에 자리한 음식점에서 이곳 산나물로 만든 비빔밥과 된장찌개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이어서 일행은 청량지문이라는 큰 대문을 통과해 퇴계 선생의 발길이 남아있는 청량산으로 향했다. 먼저 청량지문을 지나면 만나는 것이 퇴계 선생 시비다. 퇴계 선생은 신물 나는 현실정치를 떠나 이곳 안동에 낙향해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청량산을 오갔다. 그래서 청량산 도립공원 내 이 시비는 그냥 산책만 즐기지 않고 걸음걸이 속에서 세상만유의 진리와 인간 본연의 자세를 탐색했던 퇴계 선생의 사유세계가 그대로 담겨있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이 시에서 퇴계 선생은 글읽기와 산책(등산)이 주는 오묘한 가치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 말하길 글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읽기와 같구나. (중략)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높이 절정을 찾아간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노쇠하여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이 시에서 퇴계 선생은 산책과 사유가 둘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주말이면 산행하는 이들로 넘쳐난다. 산을 오르면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살펴보는 자세를 잠시만이라도 가진다면 산 오르는 일 또한 한권의 책을 읽는 것만큼 가치 있으리라.
21일 열린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이날 일정의 하이라이트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위치한 도산서원에 도착해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안동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청량산 청량사는 높은 곳에 있었다. 일행은 입구부터 맞닥뜨리는 깔딱 고개에 힘들어했다. 아직 석가탄신일의 뒤끝이어서 발갛게 내걸린 연등이 줄지어 서서 힘든 발길을 그나마 부축해 주었다. 청량사는 하늘 위에 걸려 있는 듯했다. 30여분을 헐떡이며 오르자 기암괴석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고 괴석들 사이 좁디좁은 계곡 언저리에 청량사가 자리해 있었다. 신라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청량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청량산 내 많은 암자 역시 유림들의 파괴 행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최근 들어 지금은 조계사 주지로 계시는 지현 스님이 수십년에 걸쳐 중창 불사를 해 면모를 갖추었다.
청량산은 퇴계 선생에겐 우리 집과 같은 존재였는가 보다. 퇴계는 이 산을 우리 집의 산이라는 뜻으로 오가산(吾家山)이라 불렀고 스스로도 청량산인이라 했다. 또 청량사 바로 밑에는 오산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집이 있는데 이곳 역시 나의 집이라 불렀다. 퇴계는 이곳 오산당까지 먼 길을 걸어와 머물면서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후에 여러 번 중수를 거쳤다고 하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뜰과 유달리 높아 보이는 댓돌은 퇴계의 강직한 성품과 닮아 있었다.
이어 찾아간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후학들을 양성하던 일종의 서당이다. 왜 갑자기 도산이라는 지명이 나타날까. 이곳은 과거 도자기를 굽던 곳이 있어서 도자기 도를 써서 도산이라 불렸고 그 이름을 따서 도산서원이라고 한다. 어지간한 궁궐을 미니어처한 것처럼 여러 당호를 가지고 있어 규모도 제법 컸다. 하지만 도산서원에서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도산서당만이 퇴계와 관련이 있을 뿐 그 외 건물들은 모두 후대에 지어진 것들이었다. 도산서당은 자그마하고 검소하고 단출했다. 뒤편에는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과 서광실을 두어 도서관 역할을 하게 했다. 박태순 선생은 “도산서원에는 퇴계의 정신과 학문의 정수가 담겨있어야 하는데 너무 인공의 미와 관료적 색채가 짙어 조선시대 한옥주택과 다를 바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마지막 일정은 영주의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시대 안향을 모시면서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시초이다. 이곳에도 퇴계의 손길이 닿아있다. 퇴계는 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해 오면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냈다. 즉 우리나라 최초로 임금이 내린 서원간판과 사서오경을 헌납받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증 사학인 셈이다. 이곳의 또 다른 가치는 1871년 흥선대원군이 단행한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옆에는 영주시가 조성한 선비촌이라는 한옥단지가 조성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영주시가 관내에 흩어져 있던 고옥들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라 한다. 하지만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해 소수서원과 선비촌이 주는 고색창연함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박태순 선생은 “과거 국토기행을 하면서 찾았던 곳을 다시 찾으면 마음이 아파 그곳을 잘 들어가지 못한다”면서 “소수서원도 예전 솔 숲 속 고즈넉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북적이는 관광지 같다”며 소수서원에 들어서지 않았다.
소수서원을 끝으로 이날 10시간에 걸친 성리학의 고향 안동일대 동행은 끝났다. 고속도로 사정을 감안해 서둘러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지금 ‘제사와 효도’라는 두 단어로만 희미하게 존재하는 이 땅의 유교세계를 생각했다.
600년 사람 사는 세상을 향했던 그 거대한 정신세계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일제 36년과 한국전쟁, 서구화가 가져온 단절의 역사만을 탓할 것인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과 대답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고속도로 사정만큼이나 답답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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