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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아, 미안해”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서 자란 남매의 밥상에는 생선 반찬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살림이 풍족하지 못한 탓에 생선의 마릿수는 넉넉지 못했다. 밥상에 올라온 갈치, 고등어, 병어 등 생선은 매번 오빠 앞에 놓였다. 어머니는 가시를 바른 하얀 생선 살을 오빠의 수저에 올려주었다. 동생의 수저로 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침을 열며]“동생아, 미안해”

해마다 여름철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보약을 지으러 다녔다. 이름난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하얀 종이에 싸인 약 한아름을 들고 오곤 했다. 한 달치 보약은 늘 오빠를 위한 것이었다. 더운 날씨에 공부 잘하고 아프지 말라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는 정성스레 달인 보약을 하얀 사기 사발에 담아 오빠 앞으로 내밀었다. 오빠는 그 쓰디쓴 액체가 동생의 입으로 향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눈치챘겠지만 남매의 이야기는 나와 세 살 터울의 유일한 여동생이 겪은 일이다. 생선과 보약이 그랬듯 맛있고 소중한 것은 남자인 내가 1순위였다. 동생은 후순위였다. 돌이켜보면 수저 하나, 사발 하나에 담겨 있던 것은 차별이었다. 선순위 아들과 후순위 딸. 어찌보면 차별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했던 듯하다. 나와 여동생은 그런 차별 속에서 길러졌고, 차별적 관계는 자랄수록 단단해졌다.

남매 사이에 차별적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동생이 차별적 행태에 불만을 표출하는 경우가 잦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내 눈에 동생의 그런 행동은 삐딱한 태도 정도로 비쳤다. 그건 아마도 내가 우리 집안의 차별적 구조를 당연지사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커가면서 나와 동생은 애증의 관계가 됐다. 크게 다툰 적도 없고, 다정다감하지도 않은 애증 관계.

나와 여동생의 차별적 성장사를 끄집어낸 것은 최근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때문이다. 이 살인사건은 강남역 10번 출구를 추모의 성지로 만들며 여성혐오 문제를 수면 위로 분출시켰다. 10번 출구 앞에 나붙은 포스트잇 상당수에는 ‘여자라서 잠재적 피해자’라는 여성들의 탄식과 공포감이 토로돼 있다. 우리가 여성혐오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글들이다. 포스트잇에 뒤이어 강남역에서는 여성혐오를 추방하자는 시위가 몇차례 있기도 했다.

‘강남역 현상’을 보면서 문득 남녀 차별이라는 개인적 체험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것은 차별 문제가 강남역 현상에 내재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별, 엄밀히 말해 차별적 사회구조가 여성혐오를 키운 하나의 요소라는 주장이 어렵지 않게 이해됐다. 그래서 10번 출구 포스트잇 가운데 ‘여성혐오와 차별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라는 글귀에 공감이 갔다.

강남역 현상을 여성혐오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시선도 있다. 현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괴리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추모글을 붙인 적잖은 사람들이 이 살인사건을 여성혐오로 규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포스트잇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여성혐오를 증언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엄연한 마당에 여성혐오를 부정하거나 도외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혐오에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문제처럼 개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문제로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 포스트잇에는 이 살인사건을 ‘사회적 비극’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강남역 현상을 대하는 인식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것도 그런 시각에 공감해야 가능하리라 본다. 적잖은 학자들이 여성혐오 해소를 위한 실마리로 차별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를 꼽는다.

공감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은 상대방의 피해를 이해하고, 자신이 가해자였거나 침묵의 동조자였다면 솔직히 사과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정하고 여성과 남성이 피해자와 가해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라는 포스트잇 문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려워진 가계 형편 탓에 동생은 상업계 고교를 가야 했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 직장생활 얼마 후 동생은 도저히 학업의 꿈을 접을 수 없어 출퇴근 시간을 쪼개 입시학원을 다녔다. 그즈음 나는 고향집에서 출퇴근하는 군대 생활, 즉 단기병 복무를 하고 있었다. 벌이가 있는 동생은 내게 틈틈이 용돈을 찔러주었다. 나는 그 돈을 놀고 먹는 데 주로 썼다. 동생이 처한 차별들에 침묵하며 차별의 과실을 야금야금 받아먹은 것이다. 나는 남녀 차별의 수혜자였다.

나는 오래전 이 같은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 내심 동생에게 미안한 감정이 솟구쳤다. 하지만 입밖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이제라도 이 지면을 빌려 사과하고 싶다. “동생아,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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