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밀주, 홈술, 혼술

안호기 논설위원

조지훈이 ‘완화삼(목월에게)’에서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고 하자, 박목월은 ‘나그네’를 통해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고 화답했다. 절친했던 두 시인이 1940년대 초반 주고받은 시다. 당시 술 빚는 모습은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은 불법이었다. 한국은 집집마다 술을 빚어 마시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왔음에도 1909년 주세법을 통해 허가를 받아야만 술을 제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술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만든 법이었다. 법에 따라 술은 소주, 막걸리, 약주 등 세 종류로 단순화됐고, 집에서 담근 술인 다양한 가양주(家釀酒) 명맥은 끊기게 됐다.

이후 90년 가까이 개인은 술을 담글 수 없었다. 1995년 조세범처벌법 ‘무면허 주류 제조’ 조항에 ‘개인의 자가소비를 위한 술 제조를 제외한다’는 문구를 추가하면서 규제가 풀렸다. 하지만 시인의 표현에서 나타났듯이 은밀히 밀주(密酒)를 제조하는 집이 적지 않았다. 밀주 단속의 절정기는 세수와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1960~1970년대였다. 먹기에도 부족한 쌀로 술을 만든다는 건 낭비라고 여겨 아예 쌀을 원료로 한 술 제조를 금지하기도 했다. 단속 세무공무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야산에 올라가 밥때가 아닌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누룩과 섞을 고두밥을 짓거나 술을 증류하느라 불을 때는 집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술을 만드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는 요즘은 집에서 술을 만들고 마시기를 즐기는 이른바 ‘홈(home)술’이 크게 늘고 있다. 온라인 쇼핑사이트 G마켓 통계를 보면 5월 중 담금술 재료인 매실 판매량이 전달보다 11배가량 급증했다. 담금주를 담는 술병과 흑설탕 판매도 크게 늘었다.

이젠 집에서 술을 빚을 수 있게 되었지만 ‘술 익는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공동체의 따뜻한 정취는 찾아볼 수 없다. 외톨이처럼 술을 마시는 ‘혼술’을 넘어 집에서 술 제조와 마시기를 해결하는 홈술은 장기간 지속되는 경기 침체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돈과 시간의 부족, 불안이 만들어낸 현대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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