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서울 엘레지’ 사진전을 개최한 프랑스 사진작가 프랑소와즈 위기에는 자신의 카메라에 비친 한국인의 내면을 ‘불안’으로 압축했다. 그는 1982년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의 표정에서 ‘순종’을 떠올렸다고 한다. 3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이방인의 눈에 한국인의 표정이 ‘순종’에서 ‘불안’으로 바뀐 것이다.
![[경향의 눈]자본은 ‘아버지’가 아니다](https://img.khan.co.kr/news/2016/06/01/l_2016060201000169800014051.jpg)
과연 무엇이 한국인의 내면을 순종에서 불안으로 바꿔 놓았을까. 권위주의 정권 시절 저항 대신에 순종을 택했던 한국인의 자화상은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에게 잘 나타나 있다. 덕수에겐 잊지 말아야 할 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었고 국가와 기업은 곧 아버지였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상시적 구조조정이 일반화된 지금 기업을 아버지처럼 여기는 사람은 ‘어버이연합’ 등 일부 극우단체 회원들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위기에가 고층빌딩과 화려한 조명 뒤로 ‘불안’을 발견한 지난 1년은 쉬운 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파견확대 등 4가지 ‘노동개악’ 파도가 쓰나미처럼 노동계를 뒤덮은 한 해였다. 이제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아버지’가 사라진 직장에서 순종이 들어설 자리는 없으며 그저 살기 위해 굴종할 뿐이다. 복종한다고 해서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다. 서울지하철 2호선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19세 노동자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우리 사회에서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이라며 오열했다.
하지만 순종에서 불안으로의 변화가 절망과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불안은 지금까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빈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직시하게 해준다고 했다. 청와대와 노동부는 비정규직을 늘리고 파견을 확대하는 노동4법을 ‘미래의 아들딸들을 위한 법안’이라고 온갖 빈말을 늘어 놓는다. 심지어 언론이기를 포기한 매체에 돈을 주고 지면을 사들여 광고가 아닌 기획기사로 포장해 내놓는다. 그래도 빈말이 먹히지 않자 박근혜 대통령은 ‘피를 토하라’고 주문하고 노동부 장관과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빈말을 믿을 아들딸들은 없다. 이미 청년들은 ‘사람이 미래’라고 떠들다 갑자기 23세 신입사원들에 명퇴 신청을 압박한 재벌의 두 얼굴에서 ‘진실’을 봤다. 박근혜표 노동개혁은 아버지로서 책임은 지기 싫으면서 노동자들을 노예로 부리고 싶은 자본의 욕망이 정치행위로 둔갑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4·13 총선을 통해 파산선고가 난 노동4법을 20대 국회에 제1호 법안으로 제출한 ‘아버지’들은 무능하거나 뻔뻔하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자본은 아버지, 대지는 어머니, 그 둘이 낳은 아이가 노동자’라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신화를 비판한 바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에도 일제시대 ‘황국근로관’이 박정희 정권 시절 ‘조국근대화론’으로 이어지면서 가부장적 기업문화에 기초해 만들어진 신화가 있다. 이제 그 신화는 생명을 다해가고 있다. 박근혜표 노동개혁의 전도사 역할을 했던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은 “기업들은 한번 뽑으면 평생을 책임지는 두려움 때문에 정규직 채용을 주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최 의원 발언은 빈말이 아니다. 아버지 행세를 하던 재벌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마저 힘들다고 커밍아웃한 것이다. 이것은 비판하거나 분노할 대상이 아니다. 애당초 기업들은 아버지가 아니며 그럴 능력과 의사도 없다. 반도체노동자 백혈병 책임을 묻기 위한 삼성전자 사옥 앞 천막농성에 17번 참여한 한 대학교수는 “우리나라 재벌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돈밖에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재벌에 사회적 책임을 기대한 일 자체가 어리석었다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자본-아버지’는 노동자의 힘과 욕망을 자본을 정점으로 한 삼각형 안에 가두기 위한 ‘오이디푸스 신화’에 불과하다. 재벌들이 아버지가 되길 포기한 지금 우리는 자본을 삼각형의 정점에서 끌어내려 노동과 자본이 대등한 위치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 점에서 최근 서울대노동법연구회 학술대회에서 나온 ‘취업규칙을 대체할 새로운 노동규범’ 주장은 의미가 있다. 사용자에 일방적인 제정·변경권한이 부여된 취업규칙은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12년을 제외하면 한국과 일본에만 존재하는 규범이다. 정부가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도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은 이유가 있다. ‘자본-아버지’라는 신화에 기초한 정부 노동개혁의 근본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는 공정경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영권이 노동권위에 군림하는 신화를 붕괴시켜 노동권과 경영권이 실질적인 평등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