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일 오후 4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는 고물상 ‘○○자원’ 앞에 흰색 스타렉스 승합차량이 들어섰다. 이어 30~40대 남녀 3명이 차문을 열고 내려 전체 무게 650㎏에 달하는 사과상자 10여개를 황급히 하차했다. ○○자원 대표 ㄱ씨는 이들과 초면이었지만 일반 폐지라고 생각해 별 의심 없이 물건을 받아줬다.
그로부터 4시간 뒤 폐지를 정리하다가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상자에서 옅은 갈색의 북한 위조지폐가 인쇄된 A4 용지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위폐는 분산돼 있지 않고 특정 상자에서 한데 모여 있었다. ㄱ씨는 오후 10시30분 휴대전화를 들고 112에 신고했다. ㄱ씨는 지난 2일 경향신문 기자에게 “너무 놀라서 따로 찍어둔 사진도 없다”고 말했다.
■지폐마다 일련번호 달라…정교하게 제작된 북한 5000원권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자원에서 북한 위폐 13만장이 발견돼 수사 중이라고 6일 밝혔다. 위폐는 사과상자에 담긴 채 발견됐다. 대부분 북한 최고액 지폐인 5000원권으로 합계금액이 현지 화폐가치로 6억여원에 달했다.
경찰 조사 결과 고물상에 위폐를 가져온 3명은 모두 탈북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부부는 40대 중반이고, 다른 남성은 30대 후반이었다. 당일 ㄱ씨는 사과상자를 받은 뒤 지인에게 잠시 고물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지인이 그날 들어온 물건을 ㄱ씨 대신 정리하다가 위폐를 처음 발견한 것이었다.
발견 당시 A4용지 1장에 위폐 3~4장이 앞뒤로 인쇄돼 있었다. 지폐마다 일련번호도 달랐다. 종이에 찍힌 지폐 외곽선대로 오리기만 하면 당장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상태였다.
인쇄상태가 일부 조잡한 점은 있었다. 이튿날 서울에 비가 내렸는데, 종이에 물기가 스며들자 잉크가 번지기도 했다.
■경찰·국정원·기무사 합동조사…위폐 최초 제공자 중국 체류
북한 위폐 발견 소식에 경찰뿐 아니라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정보사령부 등이 영등포서에 집결해 합동정부조사팀을 가동했다. 이 과정에서 위폐가 최소 3단계를 걸쳐 ○○자원까지 온 것으로 나타났다. ‘40대 남성 → 탈북자단체 → 탈북자 3명 → ○○자원’의 순으로 위폐가 전달된 것이었다.
고물상에 위폐를 가져온 탈북자 3명은 “△△단체에서 ‘편한대로 폐지로 활용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탈북자단체는 “ ‘40대 남성’에게서 보관을 의뢰받았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경찰은 위폐의 원천 소유자로 지목된 40대 남성 ㄴ씨의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다. 그는 이미 중국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난 상태였다.
■북한 위폐 제작 형사처벌 어려워…대공용의점 등 경위 파악 주력
외국에서 통용되는 지폐를 위·변조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그러나 북한은 반국가단체여서 형법 207조에서 정한 ‘통화의 위조 등에 관한 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북한 자체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서 지폐 역시 ‘외국 화폐’로 간주되지 않는다.
경찰은 중국에 있는 ㄴ씨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북한 위폐를 제작 또는 배달한 경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순위다. 경찰 관계자는 “ㄴ씨에 대한 조사를 통해 북한 화폐를 위조한 ‘목적성’이 무엇인지 밝히는 게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