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전 KDB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장이 산은 회장으로 내정된 직후인 2013년 4월7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경향신문 취재팀이 홍기택 전 KDB금융그룹 회장 겸 산업은행장을 만난 것은 지난 2월 출범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미래 계획을 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STX조선이나 대우조선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회생은커녕 상황이 더욱 어렵게 되면서 산업은행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는 한국 내 분위기를 전하자 고뇌에 찬 듯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는 특히 “산업은행 계열사에 대한 청와대와 금융당국의 인사개입이 도를 넘었다”며 “이런 인사 때문에 산은 자회사에 대한 감독에도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에 대해서도 “관료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관료와 금융기관 간에는 지금도 ‘시키는 대로 하라는’ 군대식 서열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며 “이런 부분이 투명해지지 않으면 한국 금융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난달 31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AIIB 사무실에서 1시간여 동안 이뤄졌다.
- AIIB 출범 4개월이 지났다. 활동 계획에 관심이 많다.
“아직 초기 단계여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된 것은 없다. 인원도 다 채용하지 못했다. 6월 말에 총회가 열리면 윤곽이 나올 것이고, 세미나 등을 통해 향후 계획 등에 대한 언론 설명도 있을 것이다.”
- 한국에서는 조선업 구조조정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면서 산업은행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모든 게 투명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채권단에 전적으로 맡겨줬어야 했다. 그런데 당국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당국은) 모든 사안에 관여하면서도 방식은 (흔적이 남지 않게끔) 말로 지시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압력을 받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지금은) 욕은 욕대로 먹고 있다. 안소니 퀸이 나오는 영화 <25시> 봤나. ‘게르만 민족의 표상’이라며 이용당하다 결국 전범재판에 서게 되는, 내가 지금 그 안소니 퀸 같다.”
- 대우조선에 대한 자금 지원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지난해 10월 서별관회의에서 정부 방침을 알았다. 그때는 아예 산업은행이 얼마, 수출입은행이 얼마 하는 것까지 딱 정해져서 왔다. 산업은행은 채권비율대로 지원하자고 했지만 그렇게 되면 BIS비율이 8% 이하로 떨어져 은행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수출입은행이 기업들에 선 해외보증이 다 무효가 되면서 그 기업들이 다 망한다. 결국 수은이 힘드니까 거꾸로 산은이 더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 구조조정 원칙에 위배되면 반대 입장을 밝혀야 되는 것 아닌가.
“말처럼 쉽지 않다. 2013년 STX조선과 팬오션 문제가 불거졌는데 서별관회의에서 산업은행이 무조건 떠안으라고 했다. 채권이 많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시장 붕괴로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게 국책은행의 역할이고 책임이라고 했다. 실사 결과를 봤더니 STX조선은 존속가치가 높아 채권단 공동관리로 결정했다. 하지만 팬오션의 경우 떠안는 순간 산은에 2조원의 손실이 나게 돼 있었다. 그래서 손해배상을 정부가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교수가 와서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는 얘기를 (정부가) 흘리더라.”
- 대주주로서 대우조선 부실 회계를 알아내지 못한 책임이 크다.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중공업은 2013년부터 부실을 회계에 반영했다. 그런데 대우조선은 그렇지 않아 (이상해서) 회계자료를 요구했다. 재무제표를 봤더니 장기미수채권이 1조원이 넘었다. 그래서 회계법인에 물었더니 대우조선에 확인해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소명된 것인데, 왜 산업은행이 관여하느냐고 반문하더라. 대주주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대우조선 사장은 산업은행보다 더 큰 배경을 갖고 있었다. CEO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주주 역할은 제한돼 있었다. 오히려 모 사장 때는 산업은행에서 파견된 감사를 잘랐다. 그런 상태에서 정확한 회계 부실을 감지할 수 있었겠는가. 2015년 3월 대우조선 사장의 임기가 만료돼 이런저런 후보를 올렸다. 위쪽에서 특정 인물을 찍어 검증한다며 자료를 올리라고 하더라. 결과는 그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주요 인사는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 계열사에 낙하산 인사가 심했다는 뜻인가.
“이렇게 보면 된다. 청와대 몫이 3분의 1, 금융당국이 3분의 1, 그리고 산은 몫이 3분의 1이다. 산은은 업무 관련자를 보내지만 당국은 배려해 줄 사람을 보낸다. 이런 식으로 인사한 지는 꽤 됐다.”
- 홍 전 회장 스스로도 낙하산으로 분류된다.
“박 대통령 경제교사였다. 그렇지만 공식적인 자리 이외에 대통령을 뵌 적은 없다. 그런데 산업은행장으로 가라는 연락이 왔다. 안 한다고 하면 이 정부하고는 벽을 쌓는 꼴이 된다. 거절하는 게 누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나쁜 자리인지 몰랐다.”
- 고액의 보수만 받고 제대로 역할은 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산은 재직 중일 때 받은 총급여를 보면 대학 교수 시절보다 못하다. 어떤 해는 급여 전체를 반납한 적도 있다.”
- 산업은행이 한계기업에 대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구조조정을 지연시킨 것 아닌가.
“대우조선과 STX조선에 대한 지원은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 만약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파장은 더 컸을 수 있다. STX조선은 회계법인 실사에서 청산가치보다 계속가치가 더 높았다. 당시 지원금으로 급한 회사채도 막고, 일정부분 구조조정도 가능했다. 돈 집어넣은 게 모두 공중에 뜬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STX조선은 이후 한 건도 수주하지 못했다. 이는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지원하지 않았다면 우리 경제는 바로 위기가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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