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과 기린교와 윤동주와 이야기

이기환 논설위원
[경향의 눈]판자촌과 기린교와 윤동주와 이야기

필자가 태어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산1번지 13통 7반이다. 지금 청운동~부암동 사이를 뚫은 청운터널 바로 위쪽이다. 1974년 산동네가 철거된 뒤 그 상태로 놔뒀으니 지금은 수풀만 무성하다. 발굴해보면 1960년대 동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틈나면 청운동~옥인동과 인왕 스카이웨이 등을 거닌다. 자연스레 발길이 그리 간다. 옛 추억에 대한 향수라 할까. 타마구(아스팔트 찌꺼기를 코팅한 종이)를 지붕에 올려 겨우 소낙비만 피하고 살았던 청운동 판자촌의 추억은 늘 가슴속을 후벼 판다. 필자의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이 선명한 청운·옥인 아파트는 최근 10년 사이 철거됐다.

추억여행의 맥을 끊어 아쉽지만 철거된 산동네 판자촌과 두 아파트 자리에 칙칙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969년 건립된 청운아파트의 경우 시공사를 구하지 못해 재건축을 포기했다. 1971년 지은 옥인아파트 자리는 어떤가. 원래 인왕산 녹지대를 침범한 아파트라 도시자연공원으로 복원하려던 차였다. 2009년 아파트 9동 옆 계곡에서 돌다리가 하나 발견됐다. 이것은 바로 겸재 정선(1676~1759)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 중 ‘수성동 계곡’ 그림에 등장하는 기린교와 똑같았다. 기린교의 발견으로 옥인동과 청운동의 역사가 줄줄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이곳에 비운의 왕자인 안평대군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조명됐다. 추사 김정희의 시(‘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도 새삼 회자됐다. “… 발밑에 우렛소리 우르릉(吼雷殷극下) 젖다 못한 산안개 몸을 감싸니(濕翠似과身) 낮에도 밤인가 의심되는구나(晝行復疑夜).”

필자가 상상도 못한 스토리텔링이 또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다. 기린교 발견 이후 계곡 복원 소식이 들리더니 어느 날부터 누상동의 윤동주 하숙집이 새롭게 조명됐다. 좀 어색했다. 3층짜리 연립주택 건물을 두고 ‘윤동주 하숙집’이니 뭐니 하는 모양새가 ‘오버’ 같았다. 그러더니 청운아파트에 물을 공급하던 가압장을 ‘윤동주 문학관’으로 꾸미는가 하면 창의문 옆에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대표작 ‘서시’를 새긴 조형물까지 떡 하니 세웠다. 시인이 이 언덕에 올라 ‘서시’를 썼단 말인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시인이 소설가 김송의 집(누상동 9번지)에서 하숙한 것은 1941년 5~8월 사이 딱 3개월 남짓이었다. “아침 식사 전엔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했다. 세수는 아무 데서나 할 수 있었다. … 저녁을 먹고 … 선생(김송)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 환담하고 자정 가까이 책을 보다 자리에 드는 것이다. … 참으로 알찬 나날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친구인 정병욱의 회고담이다. 시인의 누상동 시절 작품은 ‘십자가’와 ‘태초의 아침’ 등이다. 궁금증이 생겼다. 대표작인 ‘서시’와 ‘별 헤는 밤’은 대체 언제, 어디서 썼단 말인가. 1941년 9~11월 사이 북아현동의 전문 하숙집에서 쓴 것들이다. “북아현동은 7~8명이 들끓는 전문 하숙집이었다. … 졸업반인 동주형은 …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 등 인생의 가름길 … 절박한 상황에서 대표작들을 썼다.”(정병욱)

필자는 호기심이 생겨 시인의 북아현동 흔적을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시인이 찾아뵌 적이 있다는 정지용 시인의 자택(북아현동 1-64), 그리고 시인의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지냈다는 하숙집(북아현동 240) 부근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시인의 체취가 조금이라도 묻었을 법한 곳이었다. 그러나 땀깨나 흘렸을 뿐 허탕치고 말았다. 두 곳 다 재개발을 눈앞에 뒀거나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필자는 북아현동 산동네 비탈길에서 어두워진 서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인은 아마 이쯤에서 별을 헤고, 별을 노래하며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겠지. 한밤중 북아현동 골목을 걸어내려오며 온갖 상념에 젖었다.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해서 이런저런 스토리텔링으로 엮어낸 청운·옥인동은 어떻게 변했는가.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숱한 역사인물이 살아숨쉬는 ‘서촌’으로 거듭났다. 지금 이 순간 골목길에 서린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이곳 서촌을 찾는다. 반면 ‘서시’와 ‘별 헤는 밤’의 무대인 북아현동은 어떤가. 삭막한 아파트촌으로 변했거나 변할 위기에 놓였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동네가 된 것이다.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 해설자에게 “시인의 대표작 무대는 청운·옥인동이 아니라 북아현동 아니냐”고 슬쩍 운을 뗐다. 해설자의 응수가 걸작이다.

“아닐 수도 있죠. 윤동주 시인이 이곳 ‘시인의 언덕’에서 구상한 작품을 북아현동 하숙집에서 썼을 수도 있잖아요.”

‘딴은 그렇겠다’는 생각에 씩 웃고 말았다. 맞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동네와 이야기를 발굴한 동네의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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