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서 50년 넘게 먹고 자면서 일했어. 고생 많이 했지 그럼. 보리농사 지으랴, 나무 떼랴, 돼지랑 소도 키우고…. 근데 돈을 안 줬어.”
김모 할아버지는 최근 50여년간 살던 ‘주인집’을 떠났다. 그는 19살 때 어머니를 따라 수도권 A 도시에 있는 90대 ㄱ씨 집에 들어간 후 줄곧 농사일을 거들었다. 인생 전부를 그 집에서 보낸 셈이다. 그런 그가 50년만에 가출을 시도했다.
현재 할아버지를 보호하고 있는 40대 김모씨는 그가 ‘노예’나 다름없이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집주인 가족들은 “아저씨와 식구처럼 지냈다”며 억울해 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노예살이’였나, ‘먹이고 재워준 가족에 대한 배신’인가. 일단 김 할아버지가 집을 떠난 이야기부터 해보자.
■ 할아버지, 50년을 산 주인집을 떠나다.
지난 6일 김 할아버지는 옷가지를 챙겨 집에서 나왔다. 고향으로 가서 친조카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주인 ㄱ씨의 양아들 부부는 “가서 잘 살라”며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2년 전부터 옆방에 세들어 살던 김씨가 차로 할아버지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김씨가 할아버지 고향에 도착했을 때 조카들은 떠나고 없었다. 김씨는 어렵사리 조카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그들은 50여년 만에 나타난 삼촌을 맞을 준비가 돼있지 않은 듯 했다. 김씨는 한 노숙인 자활단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김씨는 자신의 직장이 있는 서울에 김 할아버지의 거처를 마련했다. 당분간 할아버지를 이곳에서 지내게 하며 살 길을 알아볼 요량이었다.
당시 할아버지 통장에는 550만원이 들어 있었다. 김씨는 할아버지가 지낼 방을 구하는 데 쓰기 위해 이 돈을 인출하고자 했다. 김씨는 지난 8일 할아버지와 함께 은행에 갔다. 하지만 통장 주인인 할아버지가 한글을 쓸 줄 몰라 인출신청서를 작성하지 못했고, 두 사람이 가족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찾지 못했다.
이날 양아들 부부는 해당 은행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스피싱 위험에 처해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은행원이 김씨를 사기꾼으로 의심한 것이다. 당황한 양아들 부부는 통장 지급정지를 신청하기 위해 관할경찰서에 할아버지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은행 폐쇄회로(CC)TV를 통해 할아버지와 동행한 인물을 김씨로 특정했다.
김 할아버지가 집을 나온 지 10일째 되던 16일, 보호자 김씨는 영리적 목적으로 사람을 유인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은 김씨가 돈을 노리고 할아버지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주인집을 떠나게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한평생 일만 한 아저씨를 도우려고 했다”며 “최근까지 아저씨가 고구마 밭에서 새벽 5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받는 돈은 1만원뿐이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할아버지가 몇십년간 아무 문제 없이 살았는데 김씨는 이제 와서 ‘노동착취’라고 한다”며 “신고자(양주집 사람들)가 대가를 제대로 안 줬을지 모르지만 데리고 살면서 아무 문제 없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가 논에서 일하는 모습. 김씨 제공.
■할아버지 이야기 “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일해”
“옛날엔 보리가 있어 뭐가 있어. 밥 먹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어렵게 살았지.”
김 할아버지는 지난 14일 경향신문과 만나 가난했던 지난 날을 회상했다. 그는 글 쓰는 법도, 시계 보는 법도, 버스 타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환갑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그는 먹고 살기 위해 ㄱ씨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했고 그는 농사일을 도왔다.
김 할아버지는 최근까지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논두렁에서 풀 깎다 나왔어. 고구마 밭에서도 일했는데 만원 밖에 안 줬지. 새벽 5시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데 하루 만원이야. 너무 조금 줘.”
몇 해 전, 김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양로원에서 생활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집주인 ㄱ씨도 거동이 불편해져 2년 전부터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ㄱ씨는 종종 할아버지에게 “내 아들 밭에서는 일하고 돈 받지 말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ㄱ씨가 떠난 자리에는 ㄱ씨의 양아들 부부가 들어왔다. 이들 부부는 김 할아버지에게 양로원에 갈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로원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주인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나이 많고 일 못하니까 보낸 거예요. 나도 보낸다고 해서 안 간다고 했지. 갔으면 그 전에 갔지. 사람들이 양로원 가면 편하다고 하는데, 내가 가기 싫은 걸.”
할아버지는 요즘 일을 안 해서 좋다고 했다. 그는 아침에 이름 쓰는 법을 배웠다며 수줍게 웃었다.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으며 “안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50년간 고통스러운 머슴살이를 한 것일까.
■ 집주인 이야기 “민주노총 김씨에게 세뇌…”
김 할아버지를 만난 다음날인 15일, A시에서 양아들 부부를 만났다. 이들 부부는 “미스터 김(김씨)이 집에 들어온 후 할아버지 태도가 변했다”며 “아저씨(할아버지)가 노조에서 일하는 김씨한테 세뇌교육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한 “아저씨가 우리집에서 오래 살아서 식구 같이 생각했다”며 “아저씨 통장에 있는 돈도 어머니가 준 것”이라고 했다. ㄱ씨는 땅을 팔면 가족들에게 돈을 나눠주곤 했는데, 할아버지도 가족처럼 생각해서 500만원을 줬다는 것이다.
양아들은 “미스터 김 말은 모두 거짓”이라며 미리 작성해둔 고소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아들의 부인은 “올데갈데 없는 사람 먹고자게 해줬는데 노예처럼 부렸다고 말하니 억울하다”고 말했다.
“예전에 아저씨가 여기서 10년 살고 쇠경 받아서 형 집으로 갔어요. 거기 있으면서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한 걸로 알아요. 근데 형수랑 맨날 싸워서 다시 이리로 온 거예요. 밥만 먹여달라고 사정해서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됐죠.”
또 양아들 부인은 “하루 종일 일하고 만원 받았다”는 할아버지의 말도 사실이 아니라고 억울해했다.
“우리는 일 시키는 게 없어요. 다른 집 일을 한 건 맞는데, 얼마 받았는지는 잘 몰라요. 우리가 빨래해주고 밥 해주고 맨날 병원에 차로 테워다줬는데….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복을 발로 차고 나갔다고 하더라고.”
양아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그 역시 할아버지가 일을 찾아서 했을 뿐 자신이 일을 시킨 적은 없다고 했다.
“아저씨가 우리집 일을 하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했고, 우리도 힘들면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저씨는 맨날 TV 틀어놓고 낮잠 잤지. 나는 아저씨한테 논 200평 준다고 부인이랑 타협했어요. 인건비 계산 차원이 아니라 정이에요.”
■김 할아버지는 어디로…
김 할아버지는 지난 17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와 함께 관할 경찰서에 갔다. 그는 경찰서에서 “일이 힘들어서 (자발적으로) 나왔다”고 진술했다. 적어도 김씨의 꼬임에 빠져 가출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김씨 역시 18일 새벽 풀려났다. 김씨는 “내가 단돈 10원이라도 뺏었어야 경찰이 명분이 서는데 돈 빼서 쓴게 나와야 말이지…”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혐의점이 남아 있어 시간을 두고 추가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찰서에는 김 할아버지의 피붙이인 두 명의 조카도 나왔다. 한 조카는 다시 주인집에 가는게 좋겠다고 했고, 다른 조카는 양로원을 권했다.
김 할아버지는 한 노숙인 자활단체 관계자는 ‘강남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강남 아주머니가 도와줘서 살만 하다”고 말했다. 그가 언제까지 자활단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누구 이야기가 옳고, 누구 이야기가 그르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김 할아버지가 선택한 새 삶이 조금은 순탄하고, 더 아름답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