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간 책들
굽틸 매닝 지음·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 336쪽 | 1만5000원
1933년 5월, 독일 베를린 시내 광장에 대학생 수천명이 모였다. 그들은 몇 시간에 걸쳐 유대계 작가들이 쓴 ‘비독일적인 책’들을 불태웠다. 학생 대표는 “유대인은 지능은 탁월하지만 혈기는 허약하다”며 “그들은 결국 독일 정신을 해칠 것”이라고 연설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 병사가 우기 중에 야전침상에 누워 진중문고를 읽고 있다. 책과함께 제공
뒤이어 나선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유대인 지성주의는 죽었고, 국가사회주의가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나치는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등의 책을 불태워버려야 할 것으로 꼽았다.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은 국가 지정 필독서로 독일 모든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됐다. 1939년 폴란드 침공부터 1945년 항복 때까지, 나치는 유럽 점령지에서 1억권이 넘는 책을 불태웠다.
미국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나치에 맞섰다. “히틀러가 인쇄된 글자를 파괴함으로써 파시즘을 강화할 때, 미국의 사서들은 미국인들에게 더 많은 독서를 권했다.” 나아가 그들은 전장에 나간 군인들에게까지 책을 보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대규모 캠페인을 펼쳐 1800만부의 기증받은 책을 군인들에게 배급했다. 1943년부터는 정부와 출판계가 사서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이어받아 진중문고 사업을 추진했다. 군복 상의와 하의 주머니에 쑥 밀어넣을 수 있도록 작고 가벼운 ‘페이퍼백’으로 책을 만들었고, 군인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려 매달 수십종의 책을 새로 찍었다.
미국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은 물론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이르기까지 전장 곳곳으로 책을 보냈고, 1947년까지 1억2300만부 이상의 진중문고가 출판됐다. “결국 히틀러가 파괴한 책보다 더 많은 책들이 미국 군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전장의 군인들은 진중문고에 열광했다. 그들은 “습지 진흙에 엉덩이를 내려놓거나, 포획한 일본군 비행기를 기념물 도둑들로부터 지키거나, 해변 야영지의 침낭 속에 들어가 있거나, 용변을 볼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상륙을 기다리는 배 위에서, 포탄을 피해 틀어박힌 참호 속에서, 정찰 비행에 나선 비행기 안에서 그들은 책을 읽었다.
군인들은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불안을 잊을 수 있었고, 두고 온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때로는 책 속의 대담한 성적 묘사를 통해 억눌린 욕구를 해소하기도 했다. 군인들은 책을 읽으며 “얼어붙은 마음이 다시 따뜻하게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진중문고는 미국 출판문화까지 바꿨다. 군인들의 휴대를 위해서도, 전시 물자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페이퍼백이 탁월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전쟁 이전까지 페이퍼백을 내는 출판사는 2곳에 불과했으나 1943년 이후 양상이 달라졌다. 1939년 20만권이었던 미국 페이퍼백 판매부수가 1943년에 이르러 4000만권을 넘었고, 1952년에는 2억7000만부로 늘었다. 1959년에는 미국 출판 역사상 처음으로 페이퍼백이 양장본보다 더 팔렸다.
진중문고는 입대 전부터 독서 습관이 있던 군인들은 물론 신문과 만화 말고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던 수백만명의 군인들에게도 독서 습관을 심어주었다. 나아가서 전후에도 제대군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사회 재적응을 위해 대학에 진학한 제대 군인들은 일반 학생들보다도 훨씬 더 진지하고 우수했다.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도 참호 속에서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했으니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검열에 맞선 노력이 없었더라면 진중문고도 그 같은 성과를 낼 수 없었을지 모른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미국 내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서 미국 내 유력 정치인들은 진중문고에 대한 검열을 시도했다. 진중문고 사업을 주관한 협의회는 물론 육군과 해군까지 검열법안 철회를 요구했다.
언론은 “정치적 검열은 미국에서 설 자리가 없는 파시즘이나 쓸 방책”이라며 “군인을 민간인과 구별하여 읽을거리를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적 전통은 전쟁 기간에도 쇠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1978년 군대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진중문고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군대는 양서로 손꼽히는 책들까지 금서로 지정한 반면 70년 전의 미국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지역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까지도 전장으로 보냈다.
이 책은 진중문고를 소재로 1940년대의 미국과 전쟁을 살폈다. 일종의 문화사로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군인들에게 책을 보내기 위해 애쓴 수많은 이들의 기록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책은 책 자체의 가치와 효용을 진솔하지만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전한다.
포탄이 쏟아지는 참호 속에서 불안과 공포도 잊은 채 책을 읽어내려가는 병사들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언젠가 식사를 미루고 잠도 잊은 채 책에 빠져들었던 독자 자신의 아스라한 추억까지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