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홍이 형은 유난히 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더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은평구 서울시립서북병원 장례식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선체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 김관홍씨(43)의 발인식이 거행됐다. 김씨는 앞서 17일 오전 7시52분쯤 경기 고양시 용두동 한 비닐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는 세월호 선체 수색 중 당한 부상으로 잠수작업을 하지 못해 생계의 어려움을 겪었고 우울증, 수면장애 등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김씨와 함께 세월호 선체 수색작업에 나섰던 민간잠수사 세 명을 만났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한양대 앞에서 만난 배상웅(38), 조요한(27) 잠수사는 김씨가 자주 외로움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같은 날 밤 경기 부천시에서 만난 황병주씨는 자신도 김씨처럼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말했다. 황씨는 육체적인 고통에도 시달리고 있다. 수색작업으로 신장이 나빠져 일주일에 세 차례씩 투석치료를 받고 있다.
바닷속 잠들지 못한 아이들 생각에 눈 질끈 감고 하루 수차례 몸 던졌지만 돌아온 건 해경의 배신·국가의 무관심 상한 몸과 트라우마로 ‘고통의 세월’ 잠수사로서 ‘사형선고’…앞이 ‘캄캄’ 얼마나 더 죽어야 ‘피해자’ 신분 될까
침몰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2분쯤 전날 인천에서 승객 447명과 승무원 29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가던 카페리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북방 맹골수도 해상에서 항로 변경 중 돌연 좌현으로 약 30도가량 기울었다. 10시17분쯤 108.1도까지 기운 세월호는 11시18분 선수 일부만 남긴 채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산업잠수사 황병주(57), 배상웅(38), 조요한(27)씨는 이날 각기 다른 장소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침몰 소식을 접했다. 당장 현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는 없었다. 오전 11시 무렵 ‘전원 구조’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오보임이 밝혀지고 적어도 310명 이상이 탈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민간잠수사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공우영씨(61)를 중심으로 잠수사들의 사적 연락망이 가동됐다. 황병주씨는 4월18일 선배 잠수사의 연락을 받고 20일 오후 사고 해역의 바지선 ‘2003 금호’에 도착했다. 그는 물때를 기다렸다 저녁에 곧장 입수했다. 세월호 침몰 나흘째였으므로 ‘구조’ 작업이라기보다는 ‘시신 인양’ 작업이었다. 선체 유리창을 깨고 진입해 손으로 더듬어보니 여러 구의 시신이 잡혔다. 황씨는 “너무 화가 나서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말했다. 황씨는 23일까지 민간잠수사는 6명이었다고 말했다. 23일부터 잠수사들이 증원됐다. 23일은 바지선을 기존의 ‘2003 금호’에서 언딘 소속 ‘리베로’로 교체하던 날이다. 리베로는 감압 체임버와 고압산소를 공급하는 유압장비 등을 갖추고 있었다. 고 김관홍씨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세팅된 바지선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럼 들어가도 되겠지’라고 생각해 4월23일에 현장으로 갔다”고 말한 바 있다. 조요한씨도 다른 잠수사 2명과 함께 4월23일 합류했다. 배상웅씨는 현장에 있던 선배 잠수사들로부터 “3~4일만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5월4일에 합류했다.
잠수사들은 리베로 갑판의 3×6m 크기 컨테이너에서 잠을 자고 쉬었다. 5월 초까지도 이불과 베개가 없어 잠수사들은 직접 가져온 침구류나 침낭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난방도 거의 되지 않았다. 식사의 질도 나빴다. 조요한씨는 “밥, 국, 김치, 나물, 단무지가 전부였다. 한 달 정도 지나 고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배상웅씨는 “양이 부족하거나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 날씨가 나쁘면 아예 배달되지 않기도 했다”고 말했다.
수색
4월23일 이후 민간잠수사들의 수는 26명까지 늘었다. 수색작업은 조류가 약해지는 물때에 맞춰 하루 4차례 이뤄졌다. 선체 내부 수색은 민간잠수사들의 몫이었다. 세월호 수색을 위해서는 공기통을 메고 잠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기호스를 사용하는 표면공급식 잠수가 필요했는데, 해경은 경험과 인력이 부족했다. 해경이 바닷속 선체 밖에서 공기 호흡 호스를 잡고 있는 동안 민간잠수사가 선체 내부로 들어가 수색했다.
수색은 눈이 아니라 거의 손에 의존했다. 시야가 확보되는 날은 한 달에 두세 차례뿐이었다. 비교적 시야가 잘 확보되는 날이라도 수색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뻘물이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배상웅씨는 “랜턴을 수경에 바짝 붙여야 겨우 불빛이 보일 정도였다”고 말했다. 잠수사들은 일반적인 잠수 기준을 초과해 작업했다. 통상 세월호가 가라앉아 있었던 수심 45m 지점에서의 작업은 하루에 한 번, 한 번에 30분 정도의 작업 시간이 적정하다. 잠수사들은 1인당 하루 두세 차례씩 물에 들어갔다. 여기에 선체 도면 숙지 및 작업 방식 논의 등 사전 준비, 잠수 후 회복 등에 투입된 시간을 포함하면 하루 평균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으나, 피로를 호소할 겨를이 없었다.
“바지선에 항상 유족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울고 있고 어떤 사람은 난간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유족들의 눈빛을 보면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경은 자신들도 들어가면 안된다는 걸 안다면서도 다칠 경우 치료비는 국가에서 다 지원할 테니 들어가달라고 했다.”(배상웅) “아이들이 많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시신이 있는데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조류가 약해지는 정조시간만 되면 들어갔다. 항상 흥분상태여서 피로를 느끼지도 못했다. 전쟁터에 나온 느낌이었다.”(황병주) 잠수사들은 고 김관홍씨가 이런 와중에서도 유족들이 보이면 커피와 물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했다.
‘언딘 잠수사’라는 비난과 해경의 배신
참사 후 전국에서 500~700여명에 이르는 잠수사들이 사고 해역에 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투입된 인원은 수십명 규모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해경과 언딘 소속 잠수사들이 구조 초기에 다른 민간잠수사들을 작업에서 배제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들은 “언딘 잠수사라는 건 없었다”고 말했다. 언딘은 바지선 리베로와 리베로의 장비를 제공했을 뿐 자체적으로 보유한 잠수사는 없었고, 민간잠수사들은 사전에 해경이나 언딘과 어떤 계약도 맺은 적이 없이 자발적으로 현장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잠수사들은 침몰 선박 구조작업의 특성상 실제 투입 가능한 잠수사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배상웅씨는 “잠수를 레포츠 수준으로 즐기는 잠수사들은 애초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다. 국내에 산업잠수사가 1000명쯤 있는데 이 중에서도 수색작업을 할 수 있는 이들은 50여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황병주씨는 “예컨대 5시에 들어간다고 치면 3시30분부터 잠수사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서 장비를 잔뜩 내렸다. 그러고는 그냥 서 있었다”고 말했다.
수색작업이 가능한 산업잠수사들이 모두 달려온 것도 아니다. 수중 작업을 요구하는 토목공사나 해양 작업에 투입되는 산업잠수사들은 3~5월과 10~11월에 집중적으로 일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시기와 겹친다. 실제로 세월호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들 중 소수도 미리 계약된 일 때문에 선체 수색을 중단하고 떠났다. 능력은 있지만 생업도 생각해야 하는 민간잠수사들의 자발적 선의에만 맡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수난구호비용 기준을 세워 고용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잠수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간잠수사들을 배제했다는 의혹도 억측이라고 주장했다. 위험도가 높은 선체 수색작업의 특성상 “한두 다리 건너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는”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평판조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상웅씨는 “물살을 보고 돌아간 분들, 막상 물속에 들어갔다가 선체 진입은 못하고 올라와 돌아간 분들이 수십명은 된다”고 말했다.
해경은 이 같은 상황을 조율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해경은 오히려 잠수사들의 뒤통수를 쳤다. 검찰은 2014년 8월26일 민간잠수사들 중 최연장자였던 공우영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고발은 해경이 했다. 해경은 2014년 5월6일 수색작업을 하다 사망한 이광욱씨의 죽음이 공씨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씨는 해경이 5월4일 박근혜 대통령의 진도 방문에 맞춰 잠수사 인원을 갑자기 두 배 이상으로 늘리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해경이 데려온 잠수사였고, 공씨는 민간잠수사들 중 가장 연장자로서 배치 업무를 맡고 있었을 뿐 공식적인 현장책임자도 아니었다. 공씨는 지난해 12월 7일 1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검찰은 항소했다.
■후유증
리베로에서 작업했던 민간잠수사들은 7월10일 해경의 지시에 따라 해산했다. 해경은 잠수사들의 피로가 누적됐고 잠수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잠수사들은 잠수방식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해경의 해명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이들은 272명의 시신을 수습해 그 어떤 그룹보다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잠수사들은 작업 중 근육통이나 허리통증을 안고 살았다. 특히 격실 문을 열거나 통로의 짐을 치워야 하는 작업 등 하체보다는 상체를 쓸 일이 많아 부상은 상체에 집중됐다. 잠수사들은 7월10일 해산 후 삼천포 서울병원에서 2주간 무료 진료를 받았다. 고 김관홍씨는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어깨회전근막에 이상이 생겼다. 황병주씨를 포함해 김씨보다 나이가 많은 잠수사 8명은 골괴사가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골괴사는 뼈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뼈조직이 썩는 증상이다. 정부는 2014년 연말까지만 치료비를 지원하고 지난해에는 중단했다가 지난 1월부터 지원을 재개했다.
수색작업 중 신장이 나빠져 현재 주3회 투석 치료를 받는 황병주씨는 앞으로 잠수작업을 할 수 없는 상태다. 그는 지난해 여름부터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다. 지난해 10월쯤 우울증이 극도에 달해 아침에 일어나면 죽을 방법과 유서에 쓸 문구를 궁리했다. 고 김관홍씨와 함께 지난해 정혜신 박사로부터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비로소 상태가 완화됐다. 그는 “관홍이도 치료를 받고 많이 좋아졌는데 다른 사람보다 의협심이 강해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배상웅씨는 수색작업을 마친 후 1년 동안 분노조절 장애에 시달렸다. 최근에는 물속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악몽을 꾼다. 조요한씨는 트라우마 증상이 없다. 그는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며 “잘 지내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잠수사들은 ‘수난구호법’을 근거로 보상금 지급을 신청했으나 지급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받았다. 의사상자 인정도 받지 못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지난 20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세월호참사 피해지원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야 한다.
배상웅씨는 “관홍이 형이 굉장히 외로워했다.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할 때는 열정을 쏟았지만 끝나고 나면 허탈해하는 것 같았다”며 “가끔 전화를 걸어와 사람이 보고 싶다고 했는데 한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