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데기나 쇠붙이 등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모양과 기능을 갖춘 첫 화폐는 11세기 중국 송나라 때의 것이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폐는 영국 파운드화이다. 1694년 설립된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가 처음이었다. 1944년 미국 달러화에 기축통화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세계의 화폐’로 군림했다. 그런 파운드화 가치가 요즘 급락하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찬성 투표 이후 파운드화 가치는 13%가량 떨어졌다. 지난 주말 1파운드당 1.29달러로 31년 만에 가치가 가장 낮아졌다. 193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4분의 1로 쪼그라든 셈이다. 무역결제 통화로서의 파운드화 사용률은 달러화와 유로화에 이어 3번째이다. 조만간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에 추월당해 준기축통화 지위마저 내놓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온다.
화폐의 본질은 교환과 저축이지만, 탐욕스러운 금융자본가에게 화폐는 투기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결제통화 사용이 줄어드는 추세인 파운드화가 투기 대상이 된 지는 오래다. 투기꾼이 가장 반기는 것은 큰 변동성이다. 최근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고 엔화는 급등한 상황 역시 수익을 챙길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였다. 예컨대 브렉시트 투표 직전 보유했던 파운드화를 모두 팔아 엔화를 샀다면 2주 뒤 자산이 20% 가까이 불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파운드화 투기로 큰 재미를 봤던 인물은 각국 중앙은행조차 두려워하는 ‘헤지펀드 대왕’ 조지 소로스이다. 1992년 파운드화 대폭락을 예견하고 선제적인 매도로 큰 이익을 냈다. 이번에도 대폭락을 전망했던 소로스는 정작 파운드화 약세에 베팅하지 않고도 수익을 냈다.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 시민 상당수는 자국 화폐가치가 떨어져 국제적 위상이 하락하고 투기꾼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을 것이다. 가치가 하락한 파운드화는 영국 경제의 핵심인 금융산업의 근간마저 흔들게 된다. 전문가들은 파운드화 가치가 계속 떨어진다면 영국이 경제침체와 물가상승에 시달릴 우려가 크다고 진단한다. 브렉시트는 경제 불균형을 초래한 세계화에서 벗어나겠다는 영국 시민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세계화의 덫에 너무 깊숙이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