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후 4시50분쯤 서울 강동구에 있는 한 오피스텔 건물의 타워 주차장. 반바지 차림의 3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주차장 입구로 다가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노란색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자신의 차량이 내려오길 기다리던 이 남성은 종이가방을 주차장 입구 한쪽에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자신의 차량이 내려온 걸 확인한 이 남성은 차를 몰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종이가방은 바닥에 그대로 놔둔 채였다.
차가 떠난 후 10분가량 지났을 즈음 한 이웃 주민이 이 종이가방을 발견했다. 가방 속을 본 이 주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가방 안에는 5만원권 다발이 수두룩했다. 수천만원은 돼 보였다. 당황한 그는 우선 경찰에 신고했다. 종이가방 속에 든 현금은 모두 5400만원이었다.
30분이 지났을까. 30대로 보이는 또 다른 남성이 전화통화를 하며 종이가방이 놓여 있던 자리로 왔다. 그는 애초 종이가방을 내려놓고 간 남성과 통화하면서 경비원에게 종이가방의 행방을 물었다. 이 남성은 결국 종이가방이 경찰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흘 후 뭉칫돈을 놓고 갔던 남성과 지인 한 명이 강동경찰서를 찾았다. 해수욕장 튜브 사업을 하기 위한 자금이니 돌려달라고 했다. 경찰은 출처가 불확실하니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며 두 사람을 일단 돌려보냈다.
뭉칫돈 주인이 오기 전 경찰은 사건을 접수한 당일부터 주차장 폐쇄회로(CC)TV 등으로 내사 중이었다. 최근 성매매와 불법 도박장으로 오피스텔이 이용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경찰은 이 뭉칫돈의 정체에 의심을 품었다. CCTV를 통해 그전에도 이 남성들이 돈이 든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방을 운반하는 걸 확인했다. 두 남성이 돈을 돌려받기 위해 경찰서로 온 날 저녁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뭉칫돈을 찾으러 갔던 두 남성은 낌새를 알아차렸다. 이들은 경찰서를 다녀와서는 곧바로 짐을 싸고 다른 지역 오피스텔로 이사해버렸다. 경찰이 이후 CCTV를 확인하니 컴퓨터 모니터 10여대가 이삿짐 차량에 실리고 있었다. 이를 본 경찰은 이들이 불법 도박을 벌여왔다는 걸 확신했다.
경찰은 추적 끝에 지난 8일 강남 지역의 한 오피스텔에서 불법 온라인 도박에 한창이던 이들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이들 일당은 뭉칫돈을 찾으러 경찰서를 찾았다가 4일 만에 꼬리가 밟힌 것이다.

한 남성이 현금 5400만원이 든 종이가방을 주차장 입구에 내려놓고 있다. 강동경찰서 제공
강동경찰서는 오피스텔에 합숙하며 온라인상에서 상습도박을 하고 불법 도박사이트로 고객들을 유인한 혐의(상습도박 등)로 김모씨(35) 등 2명을 구속하고,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8일 밝혔다. 경찰은 또한 총책 이모씨(37)를 추적하고 있다. 총책 이씨는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진과 유대관계를 맺어온 인물로 알려졌다.
구속된 김씨 등은 지난 5월부터 최근까지 강동구 한 오피스텔에서 불법 도박사이트에 접속해 홀수 또는 짝수를 맞히는 게임인 ‘사다리’에서 홀짝 모두에 베팅을 하는 이른바 ‘양방 베팅’으로 도박을 벌여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1회에 20만~30만원씩, 하루 100여차례 베팅을 하는 등 2개월간 24억원대의 상습도박을 벌여 1억여원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불법 도박 사이트들이 고객 유치를 위해 도박 자금을 충전하면 충전금액의 10~15%를 보너스로 지급하고 있는 점을 이용했다. 이들은 여러 불법 도박사이트에 가입한 뒤 양방 베팅을 하며 충전금 보너스도 함께 챙겼다.
경찰 관계자는 “결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는 불법 스포츠 도박과 달리 5분에 한 번씩 승패가 나오는 주사위·사다리 등 홀짝 개념의 미니 도박이 성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 일당은 상습도박을 하면서 고객들을 불법 도박사이트에 가입하게 하고 해당 사이트로부터 고객들의 베팅금액 0.5~1%를 수수료로 받는 ‘총판’ 역할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총책 이씨를 추적 중”이라며 “이들 일당이 가입해 도박을 하거나 총판영업을 한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