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헌신 박형규 목사 별세
독재정권에 항거, 6차례 옥고
‘길 위의 신학자’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불리며 평생을 빈민·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박형규 목사가 18일 오후 5시30분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4세. 박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6차례의 옥고를 치르는 등 고난의 길을 걸었던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다.
1923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박 목사는 부산대 철학과를 나온 후 1959년 도쿄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해 4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공덕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며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평범한 목회자로 살아오던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30대 후반에 일어난 4·19혁명이 계기가 됐다. 당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후에 “들것에 실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를 떠올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사회 부조리와 부정부패, 유신체제의 불의에 눈뜬 박 목사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4·19 혁명 당시부터 독재 정권에 저항해 내란 음모죄, 긴급조치, 집시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6차례 투옥됐다.
1973년 4월에는 이른바 ‘남산 부활절 사건’으로 구속된다. 당시 기독교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플래카드와 전단을 배포하려다 실패한 뒤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된 것이다. 또 1974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38년이 지난 뒤인 2012년 9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78년 2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새 민주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3·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가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1971년부터 재직한 제일교회에서 1992년 은퇴하며 공식적인 목회활동을 끝냈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 <해방을 향한 순례> <파수꾼의 함성> <행동하는 신학 실천하는 신앙인>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아들 종렬·종관씨, 딸 순자·경란씨 등 2남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01호실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02)2072-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