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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아니한가

입력 2016.09.06 20:25

수정 2016.09.0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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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논란이 일긴 했지만 영화 <덕혜옹주>에서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동포 여러분, 저는 조선의 옹주 덕혜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아무것도 해드릴 게 없다는 제 자신이 무척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정동에서]부끄럽지 아니한가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에 가담했거나 조선인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픽션이다. 제작진이 영화 상영 전 자막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밝혔음에도 조선의 황족을 미화하고, 덕혜옹주를 ‘독립의 아이콘’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국권을 지켜내지 못해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의 황녀로서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사죄해야 했다는 뜻에서 연설 장면을 넣었다고 해석하면 지나친 오독(誤讀)일까.

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는 한국전쟁과 근대화 과정을 겪으며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중년여성의 고백록이다. 학창 시절 작은 실수에도 부끄러워하며 얼굴부터 빨개지던 ‘나’는 가난에 찌든 삶을 살며 세 번의 결혼 사실을 친구들에게 거리낌 없이 얘기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일어학원을 다니게 된 ‘나’는 거리의 수많은 학원 간판을 보면서 혼잣말을 한다. “학원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이 미덕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남보다 한 뼘이라도 앞서야만 살아남는 각자도생의 ‘헬조선’에서 부끄러움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고서에나 나오는 고상한 말씀일 따름이다.

집권 이후 오만과 독선, 불통의 이미지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끄러움이란 없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새누리당 지도부를 초청해 송로버섯, 샥스핀찜, 캐비어샐러드 등 최고급 요리를 ‘민심의 강 건너 있는 궁전의 식탁’에 올려 구설에 오른 지 나흘 만인 8·15 경축사에선 “어려운 시기에 콩 한쪽도 서로 나눠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경축사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둔갑시켰고,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뤼순 감옥이 아닌 하얼빈 감옥으로 잘못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배신의 정치를 혐오하는 박 대통령은 ‘찍어내기’ 전문가가 된 듯하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 등 눈 밖에 나거나 걸림돌이 됐던 인사들은 ‘찍어내기’의 희생양이 됐다. 각종 위법행위가 확인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베풀고 있는 포용의 리더십을 이들에게도 보여줬다면 치졸한 협량의 정치를 편다는 비판에선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도덕성 논란을 빚고도 박 대통령의 임명 강행으로 입각한 장관들과 경찰청장도 부끄러움이 없긴 마찬가지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헐값 전세’ ‘아파트 헐값 분양’에다 농협은행에서 연 1%대 금리로 수억원을 대출받아 ‘갑질 재테크의 달인’이란 비난을 샀다. 그럼에도 그는 장관에 임명되자마자 경북대 출신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시골 출신에 지방학교를 나온 흙수저라고 무시한 것”이라며 비리 의혹을 제기한 언론에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혀 “적반하장” “뒤끝 작렬”이란 지적을 받았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생활비로 연평균 5억원을 쓰고, 2차례의 아파트 매매로 27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강원지방경찰청 상황실장 시절 대낮에 음주 교통사고를 내고도 신분을 숨겨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법조계 인사들도 부끄러움을 잃었다. 주식을 상납받아 120억원대 재력가가 된 진경준 전 검사장, 전관예우로 수백억원을 벌어들인 홍만표 변호사, 피의자인 사업가 친구와 부적절한 돈거래를 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모 부장검사 등은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추한 민낯’을 드러냈다. 위법과 탈법의 경계에 서며 사회적 지위를 누려온 이들이 자신의 일탈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을까.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라고 했다. <탈무드>에는 “부끄러움은 양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적혀 있다. 박 대통령과 공직자들이 헬조선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 앞에서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어 부끄럽고 죄스럽다”고 연설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기대난망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부끄럽지 아니한가’라고 쓴 깃발을 거리에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려야 하는가. 아아,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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