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한 조선업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이모씨(35)는 지난해 닥친 조선업 불황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불황의 칼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돼서다. 이후 서울로 올라온 이씨는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밤에 몸을 누이면 간신히 들어가는 고시원 쪽방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이씨는 새 직장을 찾기 위해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졌다. 어느 날 한 매혹적인 구인광고가 이씨의 눈을 사로잡았다. “해외 취업 보장. 고수익 보장. 공짜로 해외여행.” 이씨는 구인광고 안내대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업체 측 관계자와 대화를 나눴다. 상대방은 캄보디아로 오면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여행도 시켜주겠다고 했다. 비행기 삯이나 숙박비 모두 대주겠다고도 제안했다.
고졸 학력으로 취업길이 막막했던 이씨로선 ‘고수익 해외 취업’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지난해 11월 그는 짐을 싸고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탔다. 프놈펜 공항에 도착하자 낯선 남성 4명이 이씨를 반겼다. 이들은 이씨를 승합차에 태우고 한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업체 대표로 보이는 호모씨(56)를 만났다. 호씨는 이씨가 혼자 지낼 수 있는 방을 1개 잡아줬다. 공항까지 마중 나왔던 남성들은 이씨를 데리고 앙코르와트 등 캄보디아 유명 관광지를 다녔다.
2박3일간 ‘공짜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씨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호씨는 처음엔 구체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을까. 호씨는 이씨에게 일거리를 던져줬다. 건강기능식품을 한국으로 운반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몸에 숨긴 채 입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이씨는 호씨가 말한 건강기능식품이 마약이란 걸 눈치챘다.
처음에 이씨는 망설였다. 마약 밀수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호씨는 “큰일 아니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래도 머뭇거리자 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 필요하지 않느냐.” 이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압수한 필로폰. 서울경찰청 제공
호씨의 꾀임에 넘어간 이씨는 결국 마약 운반책이 됐다. 이씨는 캄보디아로 건너간 지 일주일 만에 호씨에게 받은 필로폰을 몸에 숨기고 국내로 입국했다. 그는 호씨가 시킨대로 SNS를 통해 필로폰을 1g당 80만원에 판매했다.
서울지역에서는 주택가 우편함이나 건물 화장실 변기에 필로폰을 넣어둔 뒤 구매자에게 장소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건넸다. 경기·인천 등 수도권과 지방에는 퀵서비스와 고속버스터미널 수화물센터를 통해 배송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3차례 한국과 캄보디아를 오갔다. 국내에 대기하고 있다가 또 다른 운반책으로부터 필로폰을 건네받기도 했다.
이씨의 하루하루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어딜 가나 폐쇄회로(CC)TV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경찰이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구매자들에게 필로폰을 배달하면 건당 10만~50만원씩 받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씨의 이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씨는 지난 4월 필로폰 배송을 위해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수화물센터에 갔다가 경찰에 긴급체포된 것이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씨처럼 공짜 해외여행 등의 꾐에 넘어가 캄보디아와 필리핀에서 필로폰을 들여온 또 다른 운반책 5명과 상습투약자 등 모두 62명을 검거하고 이 중 이씨를 포함한 20명을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 조사 결과 캄보디아 마약판매책 총책인 호씨는 전과자와 달리 공항에서 검문·검색을 받을 확률이 낮은 데다 마약 운반 대가 등도 잘 몰라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에서 전과가 없는 이씨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씨는 초기엔 이씨에게 필로폰 배송 수당을 꼬박꼬박 챙겨줬지만, 시간이 지나자 현지 형편이 어려워졌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호씨는 필로폰 단가를 전혀 모르는 이씨를 맘껏 부려먹은 셈이다. 경찰에 검거된 후 필로폰 단가를 알게 된 이씨는 경악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렇게 큰 범죄인지는 몰랐다. 잘못했다. 정말 후회한다”며 눈물을 떨궜다.
이씨와 함께 구속된 신모씨(23·여)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이씨처럼 마약판매책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마약사범이 되고 말았다. 경찰 관계자는 “구직난에 내몰린 청년들이 마약조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울경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