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ㄱ씨는 보관하던 돈을 사진으로 찍어뒀다. 이 가운데 일부는 빚을 갚는 데 썼고 남은 5300만원은 지난 7월 31일 분실한 상태다. ㄱ씨는 이 돈으로 김밥집을 열 계획이었다.ㄱ씨 제공
서울 강서구 마곡동 한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여성 ㄱ씨(61). 그는 지난 7월 31일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
이날은 ㄱ씨가 마곡동으로 이사한지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마곡동에서 김밥집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삿짐 정리 과정에서 박스 하나를 분실했다. 그 박스에는 오래된 헤어드라이기, 한약 봉지들 그리고 그의 전 재산인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ㄱ씨는 “봉투 안에는 5000만원과 300만원어치 수표가 있었다”고 말했다.
봉투는 ㄱ씨가 실수로 내다 버린 것이었다. 이날 오후 9시쯤 쓰레기를 치우면서 그만 봉투를 넣어둔 상자도 함께 오피스텔 밖 쓰레기장에 놓아버렸다. 이튿날 그는 돈 봉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쓰레기장을 다시 찾았지만 그 박스는 사라졌다. 그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은 CCTV의 도시다. 오피스텔 밖 쓰레기장을 비추는 폐쇄회로(CC)TV도 있었다. CCTV만 확인하면 돈 봉투의 행방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두 달 반이 지난 지금, 돈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 돈 봉투가 든 박스는 그가 가져갔다.
신고를 받은 강서경찰서는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ㄱ씨는 신고한 다음날 강력계 형사와 함께 마곡동의 쓰레기들이 모이는 쓰레기처리장을 찾았다. 인부 5명을 고용해 함께 쓰레기를 뒤졌지만 호피무늬 봉투와 돈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ㄱ씨가 거주하는 오피스텔 옆 카페의 CCTV를 확인했다. 그 결과 행방불명된 그 상자는 인근에 살면서 폐지를 줍는 ㄴ씨(67·남)가 가져간 것으로 조사됐다. 봉투는 영상에 찍히지 않았다. 그러나 상자 모양은 ㄱ씨의 설명과 일치했다. ㄴ씨는 상자를 접지 않고 무릎으로 받치듯 들어올려 자신의 리어카에 실었다. 봉투 도둑이 잡히는 듯 했다.
경찰은 ㄴ씨가 돈을 가져간 증거가 나오면 점유이탈물 횡령 혐의를 적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은 ㄴ씨는 형사 4명이 찾아가자 “상자는 가져갔지만 돈은 가져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거짓말탐지기로 조사했다. 경찰은 ㄴ씨를 강원도 원주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ㄴ씨를 데려갔다. 그러나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실시하자 ‘진실’ 반응이 나왔다. 경찰은 ㄴ씨의 집에서도 돈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더구나 은행 거래 내역도 살폈지만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돈은 누가 가져간 것인가.
■ ㄱ씨는 왜 현금을 보관했나
ㄱ씨는 잃어버린 5300만원으로 장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수년 전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다 날린 ㄱ씨는 2014년 겨울 살던 집에서 쫓겨나 사우나를 전전하며 1년 가까이를 버텼다. 그러다 20년 전 사별한 남편의 가게가 지난해 마침내 정리되면서 8500만원을 돌려받게 됐다. ㄱ씨는 먼저 3000여만원의 빚을 갚고 남은 돈은 집에 보관했다.
“빚 때문에 압류가 들어와 은행을 이용하기 어려웠던 데다, 그동안 돈이 너무 없다보니까 집에 돈을 갖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있었다”고 ㄱ씨는 설명했다. 4000만원은 집 근처에 작은 가게를 얻어 보증금으로 삼고, 남은 돈으로는 왕십리의 중고 그릇 가게에서 집기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ㄱ씨는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여러 차례 ㄴ씨를 찾아가 ‘돈을 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경찰 “명백한 증거 없어”
ㄴ씨가 돈을 가져갔다고 확신한 ㄱ씨는 애가 탔다. 특히 ㄴ씨가 상자를 수거한 다음날 30만원의 기초생활수급 급여를 타자마자 25만원 상당의 손목 착용 휴대전화를 구입한 사실을 확인하자 더욱 초조해졌다. ㄱ씨는 두 차례나 ㄴ씨가 ‘돈을 일부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가 애인 ㄷ씨의 완강한 반대로 약속이 무산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었다. 담당 형사는 “ㄴ씨가 자백하지 않으면 무슨 방법이 없다”고 했다.
지난 9월 13일 강서구의 한 식당에서 ㄱ씨와 ㄴ씨가 만났다. 당시 만남에서 오고간 대화를 ㄱ씨가 녹취했다.
ㄱ씨=돈을 안 썼느냐.
ㄴ씨=못 썼다.
ㄱ씨=쓸 수가 없지요.
ㄴ씨=사실상 주웠다고 해서 쓰지 못하겠다.
ㄱ씨=돈을 주웠다는 사실을 애인 ㄷ씨가 알고 있냐.
ㄴ씨=예.
ㄱ씨=애인 ㄷ씨가 돈을 가지고 있냐.
ㄴ씨=거기 안 줬지, 나도 주고 싶어도, 쓰라고 주고 싶어도 못 줘요.
경찰은 ㄱ씨가 제출한 녹취록을 토대로 이 내용에 대해 추가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경찰은 그동안 ㄴ씨의 말을 잘 알아듣는 전도사 ㄹ씨의 도움으로 조사를 진행해 왔다.
주정식 강서서 형사과장은 “ㄴ씨에게 (지적) 장애가 있어 의사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라 진술 내용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며 “ㄴ씨에게도 억울한 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ㄱ씨는 “직접 만나 보면 ㄴ씨는 의사표현이 뚜렷하고 판단도 명확하다”며 “정황이 분명한데도 석 달 가까이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경찰이 조사를 소극적으로 진행한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폐수집상 ㄴ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CCTV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