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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누고, 비우고, 낮추고…세상에 엉킨 문제 풀 힘은 ‘실상’에 있습니다

입력 2016.11.11 20:53

수정 2016.11.11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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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스님과 실상사, 그리고 지리산 생명평화 이야기

도법 스님이 답사단과 함께 실상사 인근을 걸으며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도법 스님이 답사단과 함께 실상사 인근을 걸으며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다 같이 심호흡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엉킨 문제들을 풀어내는 힘은 실상에 있습니다. 침착하고 냉철하게 문제를 직시해야 하죠.”

실상(實相)은 불교의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쉽게 풀어보면 생명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 존재의 참모습이다. 실상은 참된 내용을 갖고 있는 것, 진짜 중에 진짜인 것이다.

사람들과 날짐승까지 품어낼 것 같은 널찍한 평지에 자리한 천년고찰 실상사. 5일 ‘경향 70년, 70인과의 동행’ 답사단은 전북 남원 산내면의 지리산 기슭 평지에 있는 실상사를 찾았다. 어수선한 시국에도 노란 모과와 주홍빛 감을 잔뜩 달고 있는 나무들이 겨울로 가는 문턱에서 다음 생명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생명의 그물코로 함께 존재

실상사는 ‘생명평화탁발순례’ 등으로 생명의 참된 가치를 환기시켜온 도법 스님이 활동하고 있는 도량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난 도법 스님은 사찰 마당의 한 바위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사람 모양인 듯한 붉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 머리 왼쪽에는 물고기와 새, 오른쪽에는 네발 달린 짐승이 연결돼 그려져 있고 머리 위에는 나무가 뻗어 있다. 그 위 여백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다. 한글의 대표적인 글꼴인 ‘안상수체’를 만든 타이포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씨의 작품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로고야말로 ‘21세기 위대한 탄생’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우리는 유명하다고 해야 좀 관심을 가지니까, 부연설명을 할까요. 미국에서는 해마다 그해 잘 만들어진 디자인 작품을 모아서 연감을 내요. 그중에서도 대표작 3개를 뽑아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고 합니다.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로고가 그중 하나로 소개됐어요. 또 이 작품 중심으로 그해 연감이 디자인됐고요. 그곳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이 로고가 삼성 로고보다 더 유명해질 거다, 이렇게 평가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제 좀 달리 보이나요?(웃음)”

도법 스님은 ‘천하를 주고도 못 바꾸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물음을 던졌다. ‘내 생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 생명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흔히 자신의 생명은 자신 안에 있다고 여긴다.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을 확인해보면 따로따로 있는 생명이란 없다. 우리의 생각과 말, 글로서 따로 존재할 뿐 실제 우리의 생명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실상사에는 예술가들이 생명의 가치를 담은 작품들이 여러 개 전시돼 있다.  이석우 기자

실상사에는 예술가들이 생명의 가치를 담은 작품들이 여러 개 전시돼 있다. 이석우 기자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합니다. 나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저 멀리의 태양이 없다면 내 생명이 존재하지 못하잖아요. 예수의 생명도, 부처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소를 만드는 식물이 없다면, 밥 먹지 않으면 내 생명이 있을까요. 생명은 내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것과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 그 누구의 생명도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내 생명이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내 생명일 수밖에 없어요. 따로따로인 동시에 한몸인 것이죠.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나를 낮추고 나누고 비워야 합니다. 모두가 원하는 평화로운 삶이 어때야 하는지, 그림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이 하나임을 나타낸 로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이 하나임을 나타낸 로고.

바위가 있는 잔디 바닥에는 304개의 등이 꽂혀 있었다. 생명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도 함께했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이 별이 되어서 평화의 세계로 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안상수씨의 또 다른 작품이다. 깃발이 마치 푸른 바다로 나아가는 돛처럼 바람을 탔다. 밤이 되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별이 반짝인다고 했다.

■마을공동체는 새로운 문명운동

실상사 들어가는 길목에서는 멀리 지리산의 반야봉, 천왕봉, 응석봉이 보인다. 이곳들은 백두대간의 마지막 지점으로 단전(배꼽)으로도 여겨진다. 실상사는 경전에서 벗어난 ‘혁명적인 불교사상’을 처음으로 펼친 사찰로도 유명하다. 9~10세기 신라 말 고려 초 사회변동기에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이 펼쳐진 구산선문의 최초 가람인 것이다. 실상사 수지행 기획실장은 “당시는 왕이 곧 불교이고, 민중이 중생이라고 여기는 구도였는데 ‘내 마음을 바로 보면(깨달으면) 내가 곧 부처’라는 선종 사상이 얼마나 혁명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면서 “실상사는 1990년대 초 한국불교 개혁시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초는 세속화된 한국불교에 대한 비판여론 속에 이 시대에 종교(불교)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성찰이 요구된 때다. 당시는 정부의 지리산댐 건설을 두고 반대운동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이 반대운동은 단순히 댐을 막는 것에 그친 게 아니라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성찰과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이어진다. 도법 스님을 비롯한 승려와 지역민들이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지리산 생명평화의 정신이 깃든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중·고등학생을 위한 대안학교 ‘지리산 작은학교’ 등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구체화한 곳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리산 작은학교’는 실상사에서 2.5㎞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실상사 울타리 너머 밭에 컨테이너 박스 2개로 시작한 학교다. 청년과 일반인을 위한 농업학교는 남원으로 이사했다. 3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답사한 날은 경남 밀양으로 농촌봉사를 하러 가고 없었다. 송전탑을 두고 힘겨운 싸움을 벌여온 밀양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은 아이들이 먼저 농활을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학교 마당 한쪽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노동의 수고와 보람을 체득한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있어 정겨웠다.

지리산 둘레길을 내려오며 도법 스님은 “지금은 문명사적으로도 대안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휘몰아치듯 달려오는 동안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더욱 피폐해졌다. 극심한 양극화로 불안과 혼란은 가중됐다.

탈출구 없이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더 이상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는 한계가 드러난 만큼 이 시대 새로운 판에 맞는 대안문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은 대안문명의 한 줄기를 열어갈 수 있을까. 계절마다 수많은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지리산이 이웃과 품앗이, 나눔과 비움, 낮춤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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