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부모 권리 헌장
![[맘고리즘을 넘어서]⑤양성 평등과 ‘법대로’ 작동되는 정책…맘고리즘 끊을 절대조건](https://img.khan.co.kr/news/2017/02/01/l_2017020201000023500014501.jpg)
학기 도중에 일을 그만두면 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고도 50일 만에 강의를 다녔습니다. 출산 전후 90일의 출산휴가를 어느 때라도 쓸 수 있게 한 근로기준법 74조가 비정규직인 김씨에게도 보장됐다면 어땠을까요.
정규직인 이지연씨(가명)는 처지가 조금 나았군요.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년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썩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눈치 보며 퇴근을 해도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장 늦게 남아있는 아이 중 하나였습니다.
전염병에 걸려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는데 연차는 이미 소진했고, 더 이상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었을 때, 선택의 순간이 왔다고 느꼈습니다. 탄력근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전례가 없었습니다. 30대 기혼여성 경력단절자 101만2000명에 합류했습니다.
근로기준법 51조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정부가 홍보하는 ‘전환형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왜 아무도 알지 못했을까요.
육아휴직을 보장해주지 않은 기업이 벌금을 얼마 냈는지 추적하는 과정은 범인 없는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지난해 육아휴직을 보장해주지 않아 사법처리된 기업은 5개.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나 불이익을 주면 2000만원 이하, 육아휴직을 허용하지 않거나 복직 후 휴직 전과 같은 업무·임금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실제 얼마의 벌금을 냈을까. 알 길이 없다. 고용노동부는 사법처리 결과를 알지 못했고, 검찰과 법원에는 1년에 5건밖에 안되는 벌금사건에 대한 통계 따위는 없었다. 주무부처·수사기관·사법부 모두에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법에 보장된 일·가정 양립제도가 유명무실한 이유다.
■ 노동시간 단축, 노동시장 성차별 해소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업무지침이란다.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비망록을 통해 알려졌다. 한국은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를 쥐어짜서 부를 축적하던 ‘박정희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떤가. 출생아 수는 달마다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우고 있으며, 한국은 지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국가로 꼽히고 있다. 가정은 이미 초토화됐고, 이제 나라가 초토화 직전이다.
여성에게 육아와 돌봄을 전담시켜 굴러가는 한국 사회의 맘고리즘은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차별과 얽혀 있다. 여성 임금은 남성의 60% 수준이며, 비정규직 중 여성 비율은 54.9%에 이른다. 장시간 노동으로 일·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봐야 한다면, 그것은 소득이 낮은 여성의 몫이다.
남성 육아휴직 비율이 한 자릿수에 머무는 것에도 ‘쏠린 임금구조’의 영향이 크다.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은 “여성은 싸게, 남성은 오래 부려먹을 수 있는, 경영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시스템”이라며 “노동시간 단축과 양성평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삼식 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대책기획단장은 “남녀 임금격차가 없고, 여성에게 고용상 불이익이 없다면 남성들도 육아휴직을 많이 쓰게 된다. 노동시장 구조부터 양성평등이 안되니까 일·가정 양립이 안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일·가정 양립정책’은 ‘여성 과로사 정책’…남성·사회가 돌봄의 주체로 나서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근무시간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임금 감소 없이 단축시키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자 칭찬 대신 비판이 빗발쳤다. 육아의 책임을 엄마에게만 돌린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그의 발언은 한국 사회의 ‘일·가정 양립제도’의 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일·가정 양립의 이중 역할을 수행해야 할 주체는 바로 엄마라는 틀 말이다.
전문가들은 일·가정 양립정책의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조주은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일·가정 양립정책은 여성 과로사 정책이다. 실제로 세 아이를 둔 복지부 워킹맘이 과로사를 했다”고 말했다.
“여성의 일터 진입의 용이성에 대해서만 걱정할 게 아니라 남성의 일터 탈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아내가뭄>의 저자 애너벨 크랩은 말한다. 육아휴직이든, 유연근로제든 그 대상이 엄마로 한정될 때 제도는 현장에서 힘을 잃는다. 맘고리즘은 유지될 것이고, 기업에서 여성은 환영받지 못하는 노동력이 된다. 스웨덴이 남성 육아휴직을 확대하기 위해 남성 육아휴직 의무제를 시행한 후 육아의 양성평등이 이뤄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육아휴직 확대 등의 정책도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조주은 조사관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대상은 공무원, 대기업 직원들로 한계가 명백한 제도”라며 “비정규직·자영업자도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조사관은 “가정 돌봄 서비스인 아이돌보미를 확대하고 민간 베이비시터 수준으로 처우를 개선한다면 많은 가정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육·교육 정책도 함께 변해야 한다. 부모가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과 동시에 교육 정책이 일·가정 양립을 전제로 세워져야 한다. 워킹맘에게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은 ‘제2의 경력단절 위기’로 작용한다. 초등 돌봄교실 등이 마련돼 있지만 내용이 부실하고, 방학 때는 그마저도 빨리 끝내거나 운영하지 않는다. 재량휴업일에는 연차를 쓰거나 조부모를 동원해야 한다. 일·가정 양립을 어렵게 하는 교육정책은 ‘전업맘과 워킹맘의 차별’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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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아빠·아이 모두 행복한 사회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바닥이다. 한국 청소년의 행복도는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불행한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맘고리즘을 넘어서는 것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고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일과 성과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를 넘어서야 한다.
김고연주 서울시 젠더자문관은 “ ‘엄마’ ‘아빠’ 혹은 ‘노동자’ 정체성만 강요받는 것을 넘어서 개인의 다른 정체성도 실현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주은 조사관은 “노동 정책, 돌봄 정책, 교육 정책에 근본적 변화와 함께 여가가 강조돼야 한다”며 “선진국에서는 성평등 지표로 여가생활의 질을 측정한다”고 지적했다. 일·가정의 양립을 넘어서 ‘일·삶의 양립’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만병통치약 같은 제도는 없다. 한국이 인구절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
‘육아 천국’ 스웨덴도 처음부터 남성들의 육아 참여가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남성 육아휴직 0.5%에서, 10명 중 9명의 아빠가 육아휴직을 쓰는 현재를 만들기까지 40년이 걸렸다. 성평등 사회,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라는 방향 속에 이뤄진 변화다. 김승섭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 어떤 변화가 바람직한가라는 판단 속에 진행된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을 마치며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촛불이 넘실대는데, 엄마 문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그래서 오히려 존재감이 약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 셋을 둔 보건복지부 공무원이 과로사하고, 남편과 떨어져 두 아들을 홀로 키우던 엄마는 육아 부담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아이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습니다. 맘고리즘은 한 엄마의 생과 사를 가르는 문제이자, 한국 사회의 존폐를 가르는 문제가 됐습니다.
맘고리즘은 모든 엄마의 문제를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먼 타국으로 건너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보는 이주노동자 베이비시터 ‘이모님’, 저출산 시대에 차가운 화장실에서 홀로 아이를 낳고 버리는 미혼모도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이 숙제를 한 번에 해낼 방법은 없습니다. 개별 가정과 일터에서 조개를 줍듯이, 동시에 사회 구조를 바꾸는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듯이 맘고리즘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