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이 미 대선에서 떨어진 날, 나와 친구는 동네의 홍어집에 가서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뭐 우리나라 일이 아니지만 클린턴의 낙선은 너무나 속이 상하는 일이었다. 홍어집에 가득한 50~60대 남성 손님들은 어쩐지 죄다 클린턴 낙선을 반기는 것 같아서 친구와 나는 심기가 좋지 않았다. 친구는 평소 말이 없고 얌전한데, 그 남성들 중 한 사람이 “거봐, 역시 여자는 안된다니까~. 나도 박근혜 대통령 찍었지만 거봐 여자는 안돼~”라고 신나게 말하자, 친구가 갑자기 그쪽을 향해 날카롭게 외치는 바람에 나는 기겁을 했다. “여자라서 찍어준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일순 크지 않은 홍어집 안이 조용해졌고, 평소 소극적이고 점잖던 친구의 격렬한 반응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직 안주가 나오기 전이었고, 클린턴 낙선의 슬픔을 맛있는 홍어로 달래려 했는데 영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남성 일행은 깜짝 놀란 듯 아무 말도 않다가 큰 소리로 한 사람씩 떠들기 시작했다. “나도 박근혜 찍었다니까? 근데 여자 대통령 하는 것 좀 보라고~” “그래그래, 나도 박근혜 찍었어~. 근데 이게 뭐야, 여자는 안돼!” 친구는 눈에 눈물까지 머금고 한마디씩 반박하기 시작했고, 조용히 홍어를 맛보려고 사태가 조용해지길 기다리던 나 역시 친구를 혼자 응전하게 놔둘 수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박정희 DNA 때문에 찍어놓고 여자 찍어준 척하지 마세요!” 이 장년 일행의 와글와글 항의하는 소리는 더욱 커졌고, 홍어집 사장님이 우리에게 와서 팔을 잡고 슬슬 밀어내는 바람에 우리는 결국 쫓겨났다. 고소한 홍어애를 못 먹은 것이 너무나 아쉬웠지만 자기가 여성 대통령 찍은 척, 그리고 여자는 역시 안되는 것을 발견한 척 우쭐우쭐하는 아저씨들이 큰 소리로 떠드는 걸 친구가 참을 수 없었다면 나 역시 참지 않는 것이 여자의 의리였다. 그날은 그렇게 하는 것이 뭔가 클린턴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굉장히 편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대책 없는 호의를 받고 인생이 꽃길같이 보이는 것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여자에 한해, 20~30대의 한때에 불과하다. 또한 이런 여성들도 끊임없이 집적거림과 비꼼에 시달리고, 아직 우리 사회의 디폴트값인 남성들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여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을 끊임없이 갈라 놓는다. ‘분리해서 통치하라’는 원칙을 여성보다 정치활동에 먼저 익숙해지는 남성들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최근 등장한 단어인 ‘메퇘지’ ‘메퇘지 쿵쿵’만 하더라도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비웃는 말의 변주라 볼 수 있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는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확인받으려 하는 것이다. “넌 저렇게 남자한테 기어오르려고 하면서 뚱뚱하고 매력 없는 여성이 아니야, 그렇지?” 이 말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여성들이 먼저 ‘쿵쿵’ 소리를 내는 것밖에 없다. “그래, 나 네 눈에 매력 없는 돼지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건 나한테 아무 상관도 없어. 저리 가줄래?”
박정희의 정치적 유산을 통해 집권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번도 자신의 젠더를 드러낸 적이 없으면서 궁지에 몰리고서야 ‘세월호 7시간’ 같은 일에 ‘여성의 사생활’이라 답했고, 지정 성별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있는 여성들은 모두 분노하고 자기 일처럼 부끄러워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무성적 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내야 하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다. 그 무성성을 이용해 집권했으므로, 이것은 여성 대통령의 실패가 아니라 그저 박근혜의 실패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 대전을 벌이고 패배한 이세돌은 멋진 말을 남겼다. “인간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다.” 그 말을 조금 바꾸어 이번 사태에 쓰고 싶다. 여성 대통령이 낙마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 낙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