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 ‘촛불혁명’ 이후 한국
윤평중 | 한신대 교수·철학 &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12일 촛불혁명 의미와 향후 한국 사회의 과제 진단 특별대담에 앞서 윤평중 교수(왼쪽)와 손호철 교수가 경향신문사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한국 사회는 헌정사상 첫 현직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에 들어섰다. 경향신문은 촛불혁명 이후 한국 사회의 과제를 짚기 위해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와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의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공동체성과 공공성 회복을 강조했다. 손 교수는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이어 공공성을 중시하는 공화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또 정치권의 개헌 논의와 관련해서는 “시민들이 개헌의 진짜 주체가 돼야 한다”고 했다. 대담은 12일 오전 경향신문사에서 이뤄졌다.
- 헌재 결정을 어떻게 봤나.
손호철 교수(이하 손) = 오랜만에 정의와 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기쁘면서도 현직 대통령이 처음으로 탄핵됐다는 점에서 슬프기도 하다. 탄핵 결정 이후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후유증은 가슴 아프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의 가장 큰 잘못은 탄핵 여론을 마치 보수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빨갱이의 행태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애국심도 없었다.
윤평중 교수(이하 윤) =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파면된 초유의 비상사태이긴 하나 지난 몇 개월간의 과정이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절차 안에서 느리지만 커다란 유혈충돌 없이 결실을 맺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서구와 비교하면 역사가 짧지만 건강하고 견고하다는 증거다. 헌재 결정문은 법리적인 측면과 사회정치적인 측면을 두루 살핀 명문이었다.
- 탄핵에 반대한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
윤 = 촛불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 시민’ 대다수는 나름의 애국심과 충정을 지닌 분들이다. 그들이 나름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일부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극렬하고 몰상식한 언행을 이유로 그들 전체를 조롱하거나 ‘쓰레기’ 취급해서는 안된다. 물리적으로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비판하되 불법적인 행동이 아닌 한 그들의 행동과 발언의 자유는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손 = 단순히 일당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다. 진정성과 확신을 갖고 있으니 문제다. 진짜 문제는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나 변협 회장까지 지낸 엘리트들이 최소한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말들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 촛불집회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하나.
윤 = 촛불혁명은 공화정의 싹을 물질적으로 보여줬다. 한국 사회는 공공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국민이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은 공공성에 복무하라는 것인데, 위임받은 권력을 사사화하고 사익을 극대화하는 행태를 보였다. 나는 한국 현대사를 좌절과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성공의 역사로 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무이하게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함께 성취했다. 앞으로 추구해야 할 제3의 비전은 ‘공화혁명’이다. 공공성의 원리를 중심으로 공사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프라이버시를 지키되 공적인 가치체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공성은 지도층에게도 부족하고 시민사회에도 부족하다. 공공성이 체화되지 않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 촛불은 시민사회가 자생적으로 환희와 기쁨의 방식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보여줬다. 성숙한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출발점을 보여줬다. 한국 민주정치의 신기원이 시작됐다.
손 =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어느 신문사의 제안을 받고 현장 르포를 썼다.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촛불집회에 대해 비판적이고 자성적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본다. 촛불은 위대하지만 영원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주체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2008년 촛불집회가 벌어진 다음해에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아무도 촛불을 들지 않았다. 옛날 운동권만 촛불을 들었다. 2012년 대선에선 박근혜가 이겼다. 대중은 위대하고 촛불은 위대하지만 정치적으로 주체화하지 못하면 꺼질 수밖에 없다. 촛불의 양면성이다.
손호철 교수
- 역사적으로 시민혁명이 구체제의 재집권으로 귀결된 전례가 있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손 = 한국 정치가 실패할 때마다 거리의 정치가 나서서 이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4·19혁명, 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6월항쟁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4·19는 5·16으로 80년 봄은 5·18학살로, 6월항쟁은 노태우의 집권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열망과 절망의 악순환을 이번에는 끊어내야 한다. 제도정치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시민들도 마음의 촛불을 끄지 말고 정치를 감시해야 한다.
윤 = 열망과 절망의 악순환을 달리 말하면, 환호와 환멸의 반복이다. 갈수록 반복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제도정치권이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시민들의 극대화된 에너지를 잘 살려야 한다. 문제는 한국 정당은 여야를 막론하고 당내 민주주의가 거의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이번 기회에 당론을 금지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더 늘리고 국회의 기능을 심화해야 한다. 국회의원 정수가 500~600명은 돼야 한다. 그중 절반은 비례대표로 채워야 한다.
- 탄핵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과제는 무엇인가.
손 = 이번 일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와 실패다. 광장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외국 학자들은 거리의 정치를 부러워하는데,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제도정치가 제 기능을 못해서 시민들이 죄다 거리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시민사회의 다양한 세력이나 이해관계가 제도정치 내에서 조정될 수 있게 할 것인가. 대의성과 대표성을 제고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직접민주주의를 극대화하고 대의민주주의의 대의성을 어떻게 높일지 고민해야 한다. 안 그러면 시민들이 또다시 촛불을 들고나올 수 있다.
윤 = 한국정치사에서 결정적 순간에 거리의 정치가 개입해서 제도정치에 충격을 주고 궤도 이탈을 막아왔다. 그러나 먹고살기 바쁜 시민들이 중요한 사안마다 거리에 나올 수는 없다. 촛불은 위대하지만 촛불이 또 다른 물신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 갈등을 체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제도정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거리정치의 요소를 최대한 담아내야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제도정치의 정상화다. 그런 점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각 정당 지도자를 포함한 직업 정치인들은 준엄한 규탄 대상이다.
손 = 표면적으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블랙리스트와 공안통치, 정경유착, 권력의 사유화, 박정희 체제의 문제가 있다. 밑바닥에는 헬조선에 대한 분노의 문제가 있다. 촛불집회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정유라다. ‘돈 많은 것도 실력’이라는 말에 청년들이 분노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성장 면에선 보수정권보다 훨씬 잘했는데 분배에서 실패했다. 이명박의 대선 승리는 시민이 분노한 결과다. 어떻게 하면 사회적 공동체를 복원시킬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
윤평중 교수
윤 = 한국 사회 최대 문제는 격차사회화다. 자유경쟁 사회에서 일정한 격차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천문학적인 격차는 부당하고 불공정하다. 격차사회를 시정하는 것이 공공성 회복의 왕도다. 또한 튼튼한 안보 위에 구축된 한반도 평화도 중요하다. 공화정의 정신에 충실한 사회의 지도자라면 (격차사회 시정과 튼튼한 안보라는) 두 날개를 통해서 민생을 개선해야 한다. 그래야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사회, 난민캠프와 다를 바 없는 한국 사회가 질적인 변화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
손 = 가짜뉴스가 국민의 정보원이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폐쇄적 커뮤니티가 형성된다. 언론이 어떻게 하면 공공성을 회복하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자성과 고민이 필요하다.
윤 = 한국 언론계의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한국 언론이 공을 세운 부분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는 가십거리를 찾고 선정주의적인 보도 행태를 보이면서 국민들에게 혼선을 준 측면도 있다. 언론계 종사자들이 진중하게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손 = 정치권은 촛불혁명 와중에도 기득권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개혁은 없고 정당들 간의 이해관계만 있다. 심각한 문제다. 1987년 체제를 극복하려면 개헌이 중요하지만 대선까지 두 달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또 지금 개헌 논의를 시작하게 되면 시급한 적폐 청산이나 개혁이 묻혀버리는 문제가 있다. (개헌에 소극적인) 문재인 세력과 (개헌에 적극적인) 반문 세력의 갈등 구도가 될 우려도 있다. 그러나 문재인 쪽 주장처럼 대선이 끝난 후 천천히 논의하자고 하는 것 또한 자칫 정치권의 밀실협상에 의한 개헌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내 주장은 촛불집회에서 나온 여러 세대, 여러 계층의 많은 발언들 속에 담긴 새로운 사회의 모습들을 모아서 새로운 공화국의 밑그림을 그리자는 것이다. 그 밑그림을 갖고 대선주자들을 압박해 대선 후 곧바로 개헌 논의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헌 논의를 정치권에만 맡겨두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윤 = 중요한 지적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내각제로 바꾼다고 해서 만성적으로 누적된 문제들이 단칼에 해결될 수는 없다. 중장기적으로 1987년 헌법을 개정할 필요는 있으나 현재 제도정치권의 수준을 보면 역사의 거대한 압력이 강제하지 않는 한 내각제가 제대로 작동할 것이냐에 대해 회의적이다. 정치학자·전문가·정치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개헌 논의를, 위임이라는 말이 적당한지 모르겠으나, 시민사회에 위임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주체가 돼 토론해야 한다. 개헌을 하더라도 진짜 주체는 시민들이어야 한다. 개헌 논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 촛불집회는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다. 이를 수용해야 할 정치권의 과제는 뭔가.
윤 = 차기 정권의 책임자는 공공성의 원리에 충실한 인물이어야 한다. 먼저 소통의 리더십이다. 박근혜가 반면교사다. 그 반대로만 하면 된다.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널리 만나 소통해야 한다. 다음은 통합의 리더십이다. 적재적소에 좋은 인물을 써야 한다. 세대 간 통합을 이뤄야 한다. 태극기집회에 참여하는 노인들은 자기 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기여했다는 것을 승인받고 싶어 한다. 청년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이면서 발언권이 약한 세대다. 한국 정당은 정의당을 제외하면 이념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대연정이든 소연정이든 (연정을) 피할 수 없다. 특정 지역의 박탈감도 해소해야 한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차별 문제다. 한국 여성의 성평등지수가 100위권 밖이다. 성장을 위해서도 경력단절 여성에 대한 문을 넓혀야 한다. 몇 년간은 쿼터제를 시행하는 게 좋겠다.
손 = 보수는 자기 혁신을 통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보수가 돼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십몇 퍼센트의 지지에 얽매여 혁신을 못하고 있고, 바른정당도 중심을 못 잡고 있다. 야권은 촛불공동정권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어느 한 정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혼자서는 일을 못한다. 대연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바른정당까지 포함하는 정책연합은 해야 한다. 진보정당은 과거의 친북 노선을 정리하고 21세기 진보정당으로 변해야 한다. 정치권 전체로 보면 자기 혁신이 제일 중요하다. 촛불혁명은 정치권에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제도정치권이 얼마나 일을 못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었겠는가.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대의민주주의의 대의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